‘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10.17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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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낙엽 떨어지는 벤치에 두 연인이 앉아있다. 여자 친구에게 묻는다. “뭐가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아?” “아니? 아무 것도 안타는데, 뭐가 타?” “가을이 타는 냄새 말이야!”

비록 연인이 아니라도 가을 타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시인 H. 하이네는 ‘가을’을 기막히게 읊고 있다. ‘가을바람에 나무는 흔들리고/ 촉촉이 밤은 야기(夜氣)에 젖고 있다/ 나는 회색 외투를 걸치고/ 마차를 타고 홀로 숲 속을 간다// 바람은 나뭇잎에 떠들썩거리고/ 전나무는 가만히 속삭이며 말한다 [가을바람에]’

집에서 나오다 보면 가로수 길이 온통 노란 은행열매다. 약간은 구린 냄새도 나고 거기를 밟으면 질퍽거리는 감촉은 그렇게 달갑지 않다. 은행알과 도토리가 툭 떨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상실감과 한편으로는 풍요로움을 느낀다.

독일의 시성(詩聖) R. M. 릴케 역시 ‘가을’을 잘 읊조리고 있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마지막 과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레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가을날〕’

가을의 계절은 부족할 것 없는 사람도 헤맬 수 있고 여름내 최선을 다한 사람도 고독할 수 있다. 가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게 되고 또 방황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만큼은 방황과 고독을 느껴도 괜찮을 것 같다. 왜냐하면 ‘가을의 고독’을 아는 자만이 익어가는 과일의 진정한 ‘단맛’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가을 음악’을 하나 추천하라고 하면 다음의 곡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진섭 곡에 박인희가 부른 낭만적인 노래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세월이 가면〕’

1956년 이 시를 쓴 시인 ‘박인환’(1926-1956)은 젊은 나이 31세에 요절했다. 시인 이상(李箱)을 기리며 사흘간 쉬지 않고 마신 술 때문이었다. 그해 이른 봄 저녁 명동의 경상도집 식당에서 시인, 작곡가 등이 술을 마셨는데 즉석에서 박인환은 시를 쓰고, 그 시를 넘겨다보던 이진섭은 곡을 붙였다고 한다. 그것에 70년대 팝송가수 ‘박인희’가 리메이크해서 애절하게 불렀던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그리움과 상실의 슬픔이 느껴지는 한국판 ‘핫’한 가을 시다. 가을이 되면 한 번쯤은 읊어보고 불러보고 싶은 시와 노래가 아닌가. 모든 것이 힘들고 어려웠던 그 시절. 전쟁의 상처는 곳곳에서 우리를 아프게 했던 시절이다. 이 시는 국민들에게 얼마나 많은 감동을 주었고 시인의 감성이 얼마나 숭고했는지 다시금 음미해 본다.

가을이 왔다는 것은 분명 산천초목이 변했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일년의 결실을 고스란히 나무에게서 엿볼 수 있는 것도 자연의 오묘함이다. 나뭇잎은 낙엽이 되기까지 어린 싹의 시절과 5월의 연푸른 시절을 알고 있는지 또 푸르고 왕성한 한여름의 시절을 알고 있는지. 이제는 다가올 혹독한 추위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이렇게 아름답게 가을을 노래한 음악과 시를 음미하면서, 추운 겨울이 오기 전 이 아름다운 만추(晩秋)를 오랫동안 잡아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실과 결실’의 계절. 마음속 후미진 곳까지 음미해보는 것도 행복한 삶의 방법이 아닐까.

김원호 울산대 국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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