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그림
나만의 그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10.05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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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좀 이른 여행으로 볼 수 없었던 중국 계림의 황금색계수나무꽃은 지금 생각해도 아쉽지만, 세계 곳곳의 낯선 문화와 유적은 늘 신비로웠고 그림 같은 풍경과 사람 사는 모습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에는 그 모습을 사진에 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러나 사진에 몰두하다 놓친 기억 저 편 흐릿한 풍경들이 자꾸 되살아나 내게 말을 걸어 올 때쯤, 지난 여행사진을 뒤적이다 어느 날 우연히 그림으로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은 왜 하게 됐을까. 아무래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다.

수업 첫날, 배워 보고 싶다는 열망 하나만으로 시작하기에는 만만치 않음을 직감했다. 그런데 첫 수업부터 강사의 교수법이 심상치 않았다. 스님의 법문처럼 내면에 간간이 파문을 일으키는 강의가 그림 수업과 좀 동떨어진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분명 내 귀를 흔들었다.

“여기 왜 오셨지요? 물론 그림 배우러 오셨겠지요. 다른 곳보다 강좌료가 약간 저렴하기도 하지요.” 하는 첫마디 말에 여기저기서 큭큭 웃음소리가 들린다. 시작부터 말에 숨김이 없다. 그럼에도 체면이나 타인을 예의 있게 배제한 강의가 얼마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그림 그리는 법만을 가르치지 않는 미술강사인 듯했다.

세상에는 피카소를 능가할 만큼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셀 수도 없이 많고 그 기준은 주관적이니만큼 우리가 누구를 흉내 낸 그림이나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림은 그릴 필요가 없다. 다만 개성 있는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길 바란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단순히, 그야말로 가볍게 그림을 조금 배우러 갔다가 듣게 된 평범한 한 마디가 순간 전광석화처럼 내 가슴을 타격했다. 평소 늘 나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은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고 딱히 또 그럴만한 동기부여도 없었다는 생각을 변명처럼 하고 있었다.

그림에 대한 부담감과 함께 자꾸 다음 수업이 기다려졌다. 그러나 그 시간만큼은 스스로에게 가장 내면적인 자신의 생각과 표현을 요구하기 때문에 긴장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조금씩 나타나는 그 표현의 결과물은 그동안 세상으로만 향해 있던 한 사람의 진심이 담긴 작은 변화일 터.

지금까지는 나이 들면서 무엇을 배운다는 것에 다소 회의적이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인가 배운다는 것은 지금껏 알고 있던 것을 수정하고 버리고 다시 생각하고 얻는 것임을 알게 됐다.

매일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바다도 오늘은 낯빛에 청량한 가을색을 실었다. 사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도심에서 물러나 지금 살고 있는 환경으로 옮겨 오면서 여러 가지 복잡함에서 많이 벗어난 느낌이다. 더러는 환경이 사람의 마음을 끌고 가기도 하는 모양이다.

수행자의 깨달음은 오랜 기간 수행해서도 아니고 고승에게서 배워서도 아닌 어떤 찰나의 그 무엇이라고 한다. 우리의 작은 깨달음이나 지혜도 철없는 어린아이의 위장되지 않은 무구함처럼 생각지도 않은 단순함에서 만나게 되는지도 모른다.

‘줄탁’은 달걀이 부화하려 할 때 알 속에서 나는 소리로 어미닭이 그 소리를 듣고 밖에서 껍질을 쪼아 부화를 돕는다는 것이다. 스스로 어떤 필요성을 느낄 때 어디선가 누구로부터 하나의 전환점이 될 만한 동기를 받아 자신의 작은 변화라도 시도해 볼 용기를 얻었다면 줄탁의 효과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다섯 가지 개성적 소재>가 내주 과제이기는 하나 그림과 함께 내 삶의 굳은 틀도 조금씩 깨어지길 바랄 뿐이다.

이정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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