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불청객, 마음의 감기
침묵의 불청객, 마음의 감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10.04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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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지는 저녁/ 나무들이 환절의 무게를/ 나이테로 가늠하고 있다/ 늦가을의 그물이 출렁이자/ 땅거미가 한 뼘씩 줄어든다/ 철새들이 바람을 열고 사라진 허공,/ 눈시울이 붉어진다/ 철 지난 안부를 가로막던/ 당신의 뒷모습이 그립다/ 가을이 폐지되었다는 풍문,/ 귓속의 녹을 닦아 내야겠다/ 마른 꽃들이 엇박자로 진다 (자작시 ‘환절기’)

오랜 세월 문인의 꿈을 접은 채,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2008년 가을 무렵,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그때는 ‘늦깎이 등단’ 전이었다. 뚜렷한 원인을 짚어 낼 수 없는 우울증은 나를 뜨겁게 담금질 해댔다. 늦가을로 접어드는 시기라 일조량은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가을임에도 날마다 흐린 날씨가 이어졌다. 그 탓인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우울 증상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온통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무기력한 나날의 무거움이 나의 어깨를 아프게 짓누르고 있었다. 한동안 의존한 것은 알코올이었다. 스스로 내린 처방에 만족하며 어설픈 치유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때로는 나를 세상과 격리시킨다는 것이 무척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두움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 헤매야 하는 불협화음의 날들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흔히 ‘마음의 감기’라고도 하는 우울증은 감기처럼 누구나 걸릴 수 있고 특히 일조량이 줄어드는 가을, 즉 환절기에 더 자주 발생하므로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이라고 한다. 나이, 인종, 지위, 성별을 떠나 누구에게나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데, 방치하면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심각한 질환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0년에 이르면 우울증이 모든 연령에서 나타나는 질환 중 1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자살’ 하면 꼭 거론되는 소설이 바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어느 봄날, 우울증을 치료하려고 산간 마을을 찾았다가 법관의 딸 로테라는 여인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베르테르, 그리고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트, 그 둘은 자살에 대한 격론을 벌인다. 결국 로테에게 사랑을 고백했으나 실연당한 베르테르는 정신적 고통과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알베르트에게 빌린 권총으로 자살한다. 그러나 작품이 유명해지면서 시대와의 단절로 고민하는 베르테르의 모습에 공감한 젊은 세대의 자살이 급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때문에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소설의 발간이 중단되는 일까지 생겼다. 급기야 괴테 자신이 직접 나서 ‘자살은 절대 안 된다’고 호소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우울증에 걸리는 이유는 마음의 상처 때문으로 생각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세로토닌이나 노에피네프린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부족한 데서 오는 부조화에 있다고 한다. 우울증은 일시적으로 우울한 기분이 들거나 개인적으로 나약해서가 아니라 호르몬계 이상으로 생기는 질환으로 결국 마음과 뇌가 연결고리를 갖고 작용하면서 생겨나는 질환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따라서 우울증이 감지되었다면 지체 없이 전문의를 찾아 상담을 한 뒤 본인에게 알맞은 처방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약물 복용이 필요하다면 거르지 말고 꾸준히 이어가는 것도 필수다. 그와 병행해 신경 써야 할 보조 치료는 우선 햇볕 아래 있는 시간을 늘려주는 것이다. 가을 햇볕은 우울증을 극복하고 기분을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햇볕을 쬐면 세로토닌이 원활하게 분비돼 안정을 찾을 수 있다. 기분이 우울하다고 집에만 있는 건 절대 금물이다. 맑은 날, 산책을 꾸준히 하고 이왕이면 친구나 가족과 함께 걷는 게 좋다. 이러한 대처 방법들은 우울증에 시달렸던 필자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며 나름대로 터득한 요령이다.

슈베르트, 말러, 빈센트 반 고흐, 버지니아 울프, 헤밍웨이, 헤르만 헤세 등 한 시대의 큰 획을 그었던 유명한 예술가들도 우울증의 큰 고통을 안고 살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 힘든 시간 속에서도 또 다른 예술적 영혼을 불태워 인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깊어 가는 가을,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소중한 메시지를 다시금 깊게 헤아려 본다.

김부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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