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과 <밀정>, 그리고 대한민국
영화 <암살>과 <밀정>, 그리고 대한민국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9.26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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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9월 영화는 <밀정>이 단연 선두주자이다. 지난해에는 <암살>이 1천270여만 명을 영화관으로 불러들였다. 14개월 후에 등장한 <밀정>도 개관 3주 만에 700만 명을 육박하고 있다. 필자는 두 편의 영화 모두 마지막 장면까지 몰입했고, 보는 내내 박진감과 긴장감에 가슴을 조였다. 탄탄한 구성과 배우들의 실감나는 연기가 재미를 보태는 데 일조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암살>에서는 일제가 의뢰한 살인청부업자조차 의열단원과 합세하게 되고, <밀정>에서는 일제 경부의 정체가 밀정인지, 의열단원인지 모르는 모호한 설정이 묘미를 더해준다.

영화 <암살>은 일제와 친일파를 처단하는 것이 소재이다. 최동훈 감독은 한 의열단원이 남긴 한 통의 편지에 주목했다. 1920년에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암살하고 붙잡혀 순국한 박재혁 의사가 의열단장이었던 김원봉에게 보낸 편지가 뒤늦게 전달된 점에 착안하여 이를 영화화했다.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즈’는 김원봉이 “일본 관헌들에겐 가장 공포의 대상이며, 20대 전후 젊은이들에겐 조국 해방의 상징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월북은 사상을 선택했다기보다 친일파들의 득세와 그들에게 당한 모멸감 때문이라고 전한다.

영화 <밀정>은 일제의 조선인 경부에게 의열단의 뒤를 캐라는 특명으로 출발한다. 김지운 감독은 실제로 1923년에 일어난 황옥 경부의 폭탄사건을 스크린으로 불러내었다. 일경과 의열단원이라는 상반된 정체성을 지닌 황옥과 열혈 독립운동가인 김시현이 협력하여 경성 폭탄 반입사건을 일으킨 것을 극화한 것이다. 나라 잃은 비극의 시대에 항일과 친일이라는 경계선 위에서 외줄 타듯 살아갔던 인물의 내면을 쫓는 것이 중심 줄거리다. 황옥은 해방 후 독립운동가들과 친했지만 그 후의 행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렇듯 역사는 현재 속에서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되자 애국지사들은 갖은 고초를 무릅쓰고 운명처럼 저항했다. 가족을 버리면서 잃은 나라에 자신을 던졌지만 대부분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어갔다. 많은 사람들은 침묵했고, 다수 지식인들은 변절하거나 순치되었다. 파렴치한 자들은 왜놈 순사나 간도 특설대원이 되어 동족을 압살했다. 해방이 되자 왜놈 앞잡이들은 숨죽이는 것도 잠시, 우익의 전위대로 변신하면서 면죄부를 받은 듯 당당했다. 6.25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그들은 마침내 국가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 권력의 칼날을 마구 휘두른 망나니들이 있었다. 김창룡은 일제 말기에 헌병 오장이 되어 2년 사이에 무려 50여 항일조직을 고해 바쳤다. 정부 수립 전 소위로 임관한 후 일제 경찰과 헌병 출신들을 모아 정보소대를 편성하고, 좌익 색출 작업을 담당했다. 김구 암살도 그가 주도했음을 안두희가 불었고, 1956년에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하기까지 그가 저지른 악행은 차마 다 필설로 형언할 수 없다. 대통령은 이런 자를 최측근에 두었고, 그가 죽자 이병도로 하여금 비문을 짓게 했다. 그는 죽어서 지금 현충원 장군묘역에 누워 있다.

김창룡에 버금가는 악인은 김종원이다. 그는 일본군 하사관 출신인데 거창 양민학살사건 등을 주도하여 잔악한 짓을 일삼았다. 그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숱한 도륙으로 그의 비호세력에 부응했다. 친일에서 독재까지 고문과 조작의 귀재 노덕술도 천하의 악인이었지만 초대 대통령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희대의 악인 이협우는 고향 사람 200여 명을 죽이고도 3선 국회의원을 지낸 후 제 명대로 살았다. 이 자들만 어찌 악인일까만 일제에 부역하고도 단죄는커녕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고관대작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린 자들이 숱하다.

두 편의 영화를 계기로 정리되어야 할 일이 있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진행되어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위 폄하 문제이다. 일부 세력들은 임시정부가 국가 성립의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면서 건국절과 이승만 국부론을 들고 나왔다. 마침내 여당에서 이를 법제화시키겠다고 하고, 야당과 강단사학계 다수가 반대의사를 표명하면서 대립하고 있다. 혹자들은 임시정부의 대명사인 김구를 대한민국 건국에 공로가 없다는 말도 내뱉는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도 벅찬 마당에 이런 논란이 우리에게 무슨 득을 가져다주는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3일에 세워졌다. 임시정부는 의열단이나 광복군 등 모든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연호를 1919년부터 기산한다고 천명했으며, 초대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되었다”라고 선언했다. 1948년에 발행된 대한민국 관보 1호에도 ‘대한민국 30년’으로 기재했다. 우리 민족의 건국 연원은 단군을 기리는 개천절이 있다. 현재의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이정호 울산북구문화원 부원장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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