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찾아온 불청객 ‘은행열매’
일찍 찾아온 불청객 ‘은행열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9.25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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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가을이면 풋내기 시인들의 서정을 흔들어놓곤 하는 시(詩)가 하나 있다. 프랑스의 시인 겸 소설가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 1858∼ 1915)’의 ‘낙엽’이란 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길에 밟히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소리, 여인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구르몽이 말한 ‘발길에 밟히는 낙엽’이 어떤 나무에서 떨어진 잎인지 누군가 거들어주는 이 하나 없어 알 길이 없고, 그래서 안타깝다. 그저 낙엽 흩뿌리는 그 숱한 종류의 나뭇잎 가운데 은행잎만은 아니었겠지 하는 정도의 지레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연세 지긋한 할머니들의 기억의 곳간 속에 샛노란 빛깔의 은행잎은 오랫동안 서정(敍情)의 왕좌(王座)를 차지하고 있었을 법도 하다. 오죽 그랬으면 대중가요 노랫말 속에서도 아름답게 각인되기도 했을까. “샛노란 은행잎이 가엾이 진다해도/ 정말로 당신께선 철없이 울긴가요…이 세상에 태어나 당신을 사랑하고/ 후회 없이 돌아가는 이 몸은 낙엽이라…”(문정선, ‘나의 노래’)

하지만 세월의 변화 탓일까, 발 빠른 도시화 탓일까? 지금은 전혀 딴판인 것 같다. ‘애물단지’로 둔갑했노라 잘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두 발길에 짓밟히면 고약한 냄새로 적개심(?)을 드러내는 자몽 빛깔의 은행열매 때문이다. 흉물스럽게 짓이겨진 은행(銀杏)열매는 더 이상 ‘서정(敍情)의 보관창고(銀行)’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불청객’ 소리나 듣기 마련인 은행열매가 올해는 예년보다 열흘에서 보름 남짓 빨리 떨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혹자는 지난여름의 고강도 불볕더위가 수은주를 올리고 일조량을 늘리는 바람에 생육이 빨라진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걱정도 그래서 빨리 찾아오는 것 같다. 울산시내 주요 도심의 은행나무 가로수들은 주위의 눈총 같은 건 아랑곳없이 떨어뜨리기 경쟁에 재미라도 붙인 느낌이다. 심한 곳은 발길에 차이는 것 모두가 은행열매들이다. ‘냄새 지뢰’ ‘은행 지뢰밭’이란 표현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닐 성싶다.

그렇다고 아무나 치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섣불리 손을 댔다간 범법자 취급 받기에 꼭 알맞다. 헤럴드경제 기자는 24일자 기사에서 “현행법상 지자체 소유물인 은행나무에 열린 열매를 따거나 주워갈 경우 절도죄나 점유이탈물횡령죄로 처벌 받는다”고 경고메시지를 보냈다. ‘은행 냄새 민원’이 늘어나자 최근엔 지자체가 나서서 ‘떨어진 은행을 주워가라’며 적극 홍보하고 있다는 소식도 같이 전했다. 7일자 연합뉴스는 “악취 탓에 골칫거리가 되는 은행나무 열매가 불우이웃을 돕는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며 부산 남구의 사례를 소개했다. 이 자치구는 지난해 경험을 살려 10월 7일까지 ‘암 은행나무’ 열매를 따서 모아 경로당에 기부하거나 판매대금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맡길 계획이다. 또 일자리 제공 차원에서 저소득층 주민 11명에게 은행열매의 수확, 세척, 건조를 맡기기로 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앞서가는 행정의 본보기가 아니겠는가.

알고 보면 은행열매는 그 효능이 포장마차의 안줏거리 수준은 훌쩍 뛰어넘는다. 전문가들 말로는 은행열매는 천식 등에 효능이 있어 그냥 먹거나 약재로 쓰이기도 한다. 또 플라보노이드 성분이 그득한 은행잎은 살균·살충 효과가 뛰어나 바퀴벌레 퇴치제로도 쓰인다. 특히 한국산 은행잎은 혈액순환촉진제 ‘징코민’의 최고급 원료로도 각광 받는 귀하신 몸이다. 그러나 울산에서는 그 효용가치에 주목하는 이가 드물다. 발상의 전환이 기대 이상의 보람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울산시와 자치구·군이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 무고한 시민들을 범법자로 만들지 않게 지혜를 짜내는 일도 행정당국이 서둘러 해결할 과제일 것이다.

<김정주 논설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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