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보일러의 이색광고
귀뚜라미보일러의 이색광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9.18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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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스 공급업체(강남도시가스)를 편입한 뒤 5월 16일자로 사명(社名)을 ‘귀뚜라미에너지’로 바꾼 ‘귀뚜라미그룹’이 4개월 후인 9월 14일, 이색광고 하나를 C 중앙지 1면 하단에 실었다. 14일이라면 ‘9·12 경주 강진(强震)’이 지축을 뒤흔든 지 이틀 후이니 무척 발 빠른 대응이다. “전국 고객님께 긴급히 알려드립니다”로 시작되는 광고 문안 일부는 다음과 같다.

“지난 12일 경주, 울산, 포항 지역에서 규모 5.8의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해당 지역을 중심으로 귀뚜라미보일러가 작동을 멈추었다는 서비스 문의 전화가 많이 왔습니다. 지진은…가스관과 가스보일러의 가스 누출로 인한 폭발, 화재 등의 2차 사고가 더 큰 인명피해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객님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귀뚜라미 가스보일러는 ‘지진감지 가스누출 탐지기’가 내장되어 있어 지진 발생 시에 작동을 (저절로) 멈추게 됩니다.”

이 글에서 귀뚜라미에너지는 사업영역이 전국구이고, 보일러 제품은 고고도(高高度) 지진 감지 능력까지 갖추고 있으며, 회사 최고의 가치는 ‘고객 안전’이라는 사실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다. 이 면밀하게 계산된 광고 문안! 자사(自社) 홍보 수단으로는 그저 그만이라는 뒷말이 나올 법도 하다. 한데 회사 자랑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귀뚜라미보일러는 우리나라가 지진 안전지대라고 생각하던 20여 년 전부터, 가스누출 화재 방지 장치를 보일러 내부에 장착하여 특허를 받았습니다. 보일러 내외부에서 생가스 및 폐가스가 누출되거나 4.5 이상 강진이 발생하면 이를 감지하여 보일러 가동을 원천 차단합니다. 여진 등 지진 발생 경고가 끝나면 별도의 A/S를 받지 않고도 재가동 버튼만 누르면 정상 가동합니다.” 다른 보일러보다 가격이 조금 비싼 이유가 ‘안전장치’ 때문이란 설명도 곁들인다.

광고 문안의 사실성 여부를 당장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사실이라면 문제가 자못 심각해진다. 강진 발생 직후 정부의 굼뜬 동작이나 대처능력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너무도 뚜렷해 보이는 탓이다. 흥미롭게도 이색광고가 실린 날 C 중앙지는 1면 머리기사 부제목 일부를 ‘정부는 우왕좌왕, 시민들도 대피요령 몰라 무방비 상태’라고 뽑았다. 또 오피니언 면의 머리사설 제목을 ‘상상 못할 비극 겪기 전에 지진 대비태세 점검하라’는 명령어로 장식했다. 사설 말미에는 울산 걱정 이야기도 덧붙였다.

“이번 경주 지진은 국민이 느낀 공포에 비해 큰 인적·물적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설마 하다가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참극이 빚어질 수도 있다. 우선 원전과 석유화학공단 등이 밀집한 울산·경주·포항·부산 등 지역을 대상으로 정밀한 지질 역학 조사를 해야 한다. 건물의 내진설계도 훨씬 더 강화시켜야 한다. 학교, 공공기관, 민간기업들의 대비 태세도 형식적 점검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 대피 훈련도 이대로는 안 되고 국민안전처 등 재난 책임당국 역시 지금처럼 있으나마나 한 조직에서 환골탈태시켜야 한다.”

그러고 보니 재난 대처 사령탑인 국민안전처는 경주 강진 직후 그 존재감이 참으로 미약해 보였다. ‘역대 최대 규모의 강진’이 울산지역까지 그토록 세차게 뒤흔들어 놓았는데도 적지 않은 시민들은 안내 문자 한 번 못 받았다. 필자만 해도 받은 문자는 8월 11일자 ‘폭염경보’와 9월 17일자 ‘호우경보’ 안내가 고작이다. 한 지인이 분통이 터졌는지 SNS 바다를 떠도는 메시지를 하나 전해 왔다. “네팔의 7.9 지진 유경험자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지진 났을 때 책상 밑에 숨으라 했는데 절대 잘못된 교육입니다. 내진설계 안 된 건물에선 무조건 건물 밖으로 뛰쳐나와야 합니다. 책상 밑에 있으면 깔려 죽습니다. 꼭 퍼뜨려 주세요.”

일개 보일러 제조업체보다 못한 존재감으로 권위가 실추된 대한민국 정부 당국. 강진과 함께 땅속으로 꺼져버린 신뢰를 되찾는 데는 350회가 넘는 이번 지진의 여진 횟수만큼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김정주 논설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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