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면 일원에 은퇴자마을 건설하는 게 꿈”
“서생면 일원에 은퇴자마을 건설하는 게 꿈”
  • 김정주 기자
  • 승인 2016.08.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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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 화학네트워크포럼 대표

올해로 만 75세지만 “정정해 보이신다” “건강관리, 어떻게 하시느냐”는 말을 참 많이 듣는다. 그때마다 내미는 암호 같은 숫자가 있다. 바로 ‘1570’이다. “1주일에 5번씩, 70분 동안 조깅하라는 의미인데, ‘70’은 100% 운동은 무리이니 70% 정도만 하라는 뜻도 있지요.”

요즘도 새벽 5시 반이면 일어나 자택(남구 야음동 롯데캐슬 2단지)에서 가까운 선암호수공원 솔밭길로 향한다. 조깅을 마치면 다시 야음시장 근처 ‘SK에너지 스포츠센터’에서 체력단련 삼매경에 빠져든다.

그러고 보니 만나기로 한 장소도 SK스포츠센터 4층이다. SK그룹 임원 출신들을 배려해서 만든 ‘유경회(油公퇴직경영인 모임)’의 울산지부 사무실이라 했다. 쉼터 겸 소통의 공간 같았다.

화공학회 울산지부장 맡아 울산대와 인연

얼마 전까지도 호칭이 ‘울산대 교수님’이었던 박종훈 화학네트워크포럼 공동대표(공동대표 또 한 분은 오규택 울산시 경제부시장). 7월 31일자로 울산대 산업대학원 초빙교수, 울산대 산학협력단 연구교수(겸 산업안전센터장) 직함을 동시에 내려놓았지만 유효한 직함은 아직도 수두룩하다. 울산시전문경력인사지원센터(NCN=New Challenger Network) 회장, 울산안전포럼 대표, 한국화학연구원 울산본부 자문위원장, 울산 미래화학산업 발전로드맵 총괄위원회 공동위원장도 그 속에 포함된다.

그렇다고 ‘완장’ 욕심 때문은 아니었다. 대부분 등 떠밀리다시피 해서 두른 직함들이었다. 그가 속했던 분야에서 진심으로 그를 필요로 했던 까닭이다. 어찌 보면 성격이 모질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SK 전무(80년대 후반∼90년대 후반) 때 일입니다. 한번은 울산대 화공학과 교수 몇 분이 찾아와선 고참 교수가 맡고 있던 ‘화공학회 울산지부장’ 자리를 저더러 맡아달라는 겁니다. 화공과 나온 SK 쪽 회원이 7명뿐이라면서….”

‘지부 활성화’ 명분에 밀려 지부장을 맡은 뒤부터 사정은 180도로 달라졌다. 3만원이면 당시 입회비로 부담 가는 편이었는데도 SK 화공과 출신들 사이에 회원가입 바람이 불었고, 급기야 회원 수가 150명으로 급증한 것. 기업체 공장장들의 협조도 큰 도움이 됐다. 덕분에 그 해엔 회원가입 전국 최다의 공이 붙어 공로상도 탔고, 지부장 5년 연임의 바탕이 됐다. 여하간 박 대표의 화공학회 울산지부장직 수락은 울산대와 11년 5개월에 걸쳐 끈끈한 인연을 잇게 된 계기로 작용한다.

울산대 교수직 지내며 산업체 경력 노하우 전수

지난 8월 1일, 언론매체들은 박종훈 대표가 울산대 교수직을 그만두었다는 기사를 일제히 실었다. 물론 울산대 대외협력팀의 보도자료가 출처였지만 그에게 ‘가시고기 교수’라는 별칭을 달아주는 매체도 없지 않았다.

‘아주경제’는 1일자 기사 제목을 <울산대 박종훈 교수 산업체 경험 전수하고 장학금까지 기부> <’가시고기 교수’의 아름다운 퇴임>이라고 뽑았다.

“지난달 31일자로 울산대학교를 떠난 박종훈(75) 교수. 그는 기업인으로서 정년퇴임 후 울산대로 자리를 옮겨 ‘가시고기’ 역할을 했다. 둥지의 알이 부화해 헤엄쳐 세상으로 나갈 때까지 자신의 몸조차 먹이로 희생하는 가시고기처럼, 37년간 석유화학업계에 종사한 경험을 후학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하고 대학발전기금까지 기부한 것이다.”

대학발전기금 1천만원을 기탁하는 모습도 사진에 담았다. 사진설명이 뒤따랐다. “SK에너지 부사장을 지낸 박종훈 교수가 지난 26일 오연천 울산대 총장을 찾아 산학협력중점교원을 퇴임하면서 1천만원을 기탁했다. 박 교수는 산업현장 경험을 학생들에게 전수했을 뿐만 아니라 퇴임 때까지 대학에 모두 7천만원을 기부했다.”

여기서 ‘산학협력중점교원’이란 ‘산학협력교수’로 울산대가 산업체 전문경력자의 노하우를 학생들에게 전수하고 산학협력 활성화를 위해 2005년부터 도입한 제도를 말한다. 박 대표는 SK에너지 부사장(울산Complex 부문장, 2001.02 ∼2002.03)직에서 물러난 뒤 2년간 SK 고문역을 맡다가 2005년 3월부터 1년간 울산대 생명화학공학부 초대 산학협력교수를 지냈다. 이후에도 교수, 초빙교수 직함으로 산업현장과 캠퍼스의 교량 역할을 거뜬히 해냈다. 다시 기사 일부를 인용해 보자.

7월말 ‘11년 5개월 인연 울산대’와 작별

“박 교수는 1967년 SK에너지에 입사해 공장장과 부사장, 고문을 거쳐 2004년 퇴사한 뒤 울산대 화학공학부 산학협력중점교원으로 임용됐다. 이후 11년 5개월 동안 후학 양성에 매진하다 (7월) 31일 울산대 산업안전센터장 임기 만료를 끝으로 대학을 떠났다. 그가 울산대에 재임하는 동안 맡은 교과목은 ‘화학공장 설계 및 운전실무’, ‘석유화학 산업현장의 이해’, ‘산업체 인턴십’, ‘산업체 현장설계’ 등으로 석유화학 분야에서 쌓은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전수하는 한편, 학생들의 취업을 연계하는 역할까지 했다. 박 교수는 또 지난 2006년 1천만원의 장학금 기탁을 시작으로 2010년부터는 해마다 1천만원씩 지금까지 모두 7천만원을 대학에 기부하기도 했다.”

장학금(대학발전기금) 1천만원을 울산대에 처음 기탁한 것은 기사대로 2006년도의 일이다. 이 대목에서 박 대표는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고 말한다. 부인 신국남 여사(70·이화여대 졸업)의 조언 덕분이었다는 것. “제 생각이 아니라 아내의 생각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당신을 위해 저토록 끔찍이 대접해 주시는데 당신도 어떻게든 고마움을 표시해야 하는 것 아녜요?’라며 꺼낸 것이 발전기금 얘기였지요.”

박 대표는 2007∼2009년의 ‘공백’에 대한 설명도 곁들인다. “‘저 친구는 돈이 얼마나 많으면 저러나…’ 하는 식으로 별별 얘기가 다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그래서 한동안 자제했고, 다시 기탁했을 때도 학교 측에 애써 ‘비공개’를 요구한 겁니다.”

그런 때문일까. 박 대표가 신변을 정리하겠다는 결심을 전하자 울산대 교무처에서 문의가 들어왔다. “이젠 공개해도 되겠냐?”는 것. 답변은 “이젠 그만두니 공개해도 좋다”였다.

발전기금 7천만원 희사… ‘가시고기 교수’

기사에서도 언급했듯이 박종훈 대표는 직장이라곤 37년 내리 ‘SK’라는 한 우물만 고집스레 팠다. 고향이 대전인 그는 충남대 화학공학과(3회)를 졸업하는 즉시 장교(ROTC 3기)로 군 복무에 임했다. 첫 직장으로 SK의 전신 유공(대한석유공사)의 문을 두들긴 것은 1967년도의 일이었고, 이로부터 2004년 고문직을 마지막으로 정든 SK를 떠나기까지 걸린 기간은 장장 37년이었다.

“처음엔 유공 본사에 입사했다가 그 이듬해(1968년) ‘교대 엔지니어’ 자격으로 울산 제1공장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당시 유공 울산1공장은 하루 11만5천 배럴의 정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했다.

매일 12시간씩 근무하고 교대하기를 거듭하던 그는 이미 울산1공장의 필수요원으로 자리를 굳혀 가고 있었다. 입사 3년차인 1969년엔 석유화학 방향조(아로마틱) 추출 공장(BTX)이 차려지면서 그 시운전을 ‘국내 최초로’ 해보는 경험을 쌓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본사 귀환은 신기루 같은 일이 되고 말았다. “원래 2년 후 서울 본사로 돌아가기로 돼 있었는데…”

그러나 그는 느낌이 섭섭하지 않았다. 작업환경이 맘에 들고 은근한 자부심도 생겼기 때문이었을까. “작업모, 워커(작업화), 작업복이 완전 ‘군대 스타일’이었지요. 적성에 딱 맞았던 것 같습니다. 또 그 당시엔 유공 유니폼만 입고 있으면 그냥 오케이 할 정도로 음식점에선 제법 알아주었지요.”

그에게는 유난히 ‘국내 최초’란 수식어가 많이 따라다닌다. 국내 최초의 석유화학기초연료 제조공간인 NCC(납사분해센터)도 70년대 초 그의 손길을 거쳐야만 했다. 그 때의 고달픈 일상도 지금 돌아보면 아름다운 추억이다. “NCC엔 모두 13명 참여했지요. 차장 2명은 미국인이었는데 토익이 없던 시절이라 영어 테스트를 해서 영어가 조금이라도 통하는 사람을 뽑았을 겁니다.”

해외연수 때 남다른 절약정신으로 ‘주목’

서울 본사 원대복귀를 단념하고 아예 울산에 눌러 살기로 작심한 박 대표에게 ‘탈(脫) 홀아비’ 기회가 돌아온 것은 1971년 1월. 지인의 소개로 중구 학성동에서 나고 자란 5년 아래 신만원국남 여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피앙세를 서울서 찾으려고 애쓴 적도 있었다. “기차로 서울 가는 데 12시간이나 걸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교대기사’ 하면서 서울 왔다 갔다 하기가 여간 고달픈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혼하던 그 해 8월, NCC 멤버들은 납사(나프타) 분해공장이 있는 세계 여러 나라 공장을 해외연수를 위해 다녀왔다. 미국, 일본 등 9개국을 두루 거쳤고 해외연수에는 6개월이 걸렸다. 그 무렵의 에피소드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미국의 현장연수가 오후 5∼6시쯤 끝나면 모두들 쇼핑도 하면서 놀러 다녔지요. 백화점에서 샘소나이트 같은 인기 여행가방을 한 사람이 사면 너도나도 덩달아 사곤 했지요. 싹쓸이해 버릴 정도로….”

그러나 박 대표는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애썼다. 남들이 100달러를 쓰면 30∼50달러 정도만 지출했다. 같은 상품이라도 일부러 조금 더 싼 것을 골라서 샀다. 미국인 차장한테서 “당신이 최고”란 말도 이때 들었다.

해외연수 뒤에 주머니에 남은 것은 우리 돈 20만원가량. 얼마를 더 보태 26만원짜리 전세방을 얻기도 했다. 그때의 추억은 지금도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아내와는 달리 저는 가진 돈이 별로 없어서 장가 갈 땐 곗돈을 타서 결혼비용에 보탰지요.” 그러면서 회상에 잠긴다.

생각해 보니 1972년도엔 야음동에 있던 11평짜리 유공 사택을 살 수 있었다. 진급을 하면 조금 더 나은 집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이사한 횟수가 자그마치 열 손가락을 헤아린다.

SK 사회공헌 최고는 ‘울산대공원 조성’

SK 시절 겪었던 경험 중에는 흐뭇한 것들이 의외로 많다. 가장 인상적인 경험을 꼽으라면 부사장 시절 울산대공원 조성의 꿈을 실천에 옮긴 일이다.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 ‘공해도시 울산’의 이미지를 ‘생태도시 울산’으로 변화시켜 보자는 구상이었는데 지금도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 결코 지울 수 없습니다.”

그는 ‘고마운 사람’으로 SK그룹 최태원 회장을 떠올린다. 1998년 IMF 사태로 기업체마다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1년에 100억원씩 희사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도 울산시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 회장이 통 큰 결심을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울산대공원은 총사업비 1천억원이 들어갔고, SK의 대공원 기부체납은 울산지역 대기업이 베푼 사회공헌 활동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울산대공원이라면 숨은 뒷얘기도 많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박 대표와 ‘끈끈한 사이’였다는 당시 심완구 울산시장과 주고받았던 얘기와 경험들이다. ‘대공원 풍차’도 그 속에 들어간다. “퇴직 6개월을 앞둔 2002년 3월의 일이었을 겁니다.” 그 전에 제주도 롯데호텔에서 보았다는 2대의 풍차에서 ‘대공원 풍차’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사람 버글버글하는 걸 보고 강력히 밀어붙였지요. 홍보팀을 제주도로 출장까지 보내면서…. 우리 대공원엔 연못도 있겠다 싶어 심 시장을 끈질기게 설득시켰지요. 처음엔 이상하지 않겠나 하던 심 시장도 나중엔 못 이기는 척 오케이 하더군요. 지금은 대공원의 상징, 랜드마크처럼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안전문화 선진국, CEO들이 솔선수범

박종훈 대표는 대화의 끝을 ‘안전문화’ 문제로 장식하고 싶어 했다. 유공과 미국 아코 케미컬(ARCO C. 텍사스 주) 간 합작경영 시절의 기억을 그는 더듬어 냈다.

“아코 케미컬은 한때 미증유의 폭발사고로 3개월 이상 공장 가동을 멈춘 아픈 경험을 간직하고 있었지요. 미국인들은 ‘안전관리가 최고’라는 인식이 대단했습니다. 우리 공장에서 시운전을 하던 무렵 아코케미컬 회장이 사장단과 함께 방문했을 때의 이야깁니다.”

유공 쪽에서는 안전 문제로 지적받는 일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미국 귀빈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때 미국 회장이 느닷없이 “보안경을 달라”며 “빨리 가져와야 둘러보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안전모는 갖춰두었는데 보안경에 신경 쓰지 않은 것이 불찰이었다. 한참 만에 찾아서 갖다 주었더니 회장은 안전모와 함께 보안경을 착용한 뒤에야 공장 시찰에 나서는 것이었다. 박 대표의 이마에도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안전의식이 그 정도로 철두철미한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아코케미컬 회장은 공장을 한 바퀴 돌고 나더니 곧장 노조 사무실부터 들러 노조 대표들과 악수하고 나서야 사무실, 회의실 들어갑디다. 또 이분들은 경영실적 보고를 받기 전에 제일 먼저 5분간 세이프티 토크(Safty Talk)를 하는 전통이 있다는 사실도 이때 배웠습니다. 안전문화 선진국에서는 안전문화에 CEO들이 솔선수범한다는 교훈도 전수받은 값진 시간들이었습니다.”

“울산엔 고마운 분들 어찌 그리 많은지”

SK에 몸담은 기간 37년에 울산대 강단에 섰던 11년 5개월을 합치면 그의 울산 생활 기록은 거의 50년에 육박한다. 울산이 가수 윤수일의 독백처럼 ‘제2의 고향’이 된 것이다.

“SK 고문직 그만두고 서울 가서 살려고 집도 장만하고 골프회원권도 구입한 뒤 2004년도에 짐을 싸서 서울로 이사란 것을 했지요. 그런데 적응이 안 되는 겁니다, 적응이. 그래서 다시 울산으로 돌아가자, 그리 된 겁니다.”

울산시민으로 돌아온 그에게는 매사가 고마움으로 다가온다. 불교 신도이지만 ‘범사에 감사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음으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행복하고 보람으로 느껴진다. 2005년부터 NCN 설립을 도와 울산테크노파크에 사무실까지 마련해 준 울산시 산업진흥과 사람들이 고맙고, 다시 든든한 멘토로서 뒤를 받쳐주고 있는 울산산학융합본부 주봉현 원장(전 울산시 부시장)이 고맙고, 한국수소산업협회 창립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이치윤 (주)덕양 대표이사가 고맙고, 매사를 뒷바라 해주는 이동구 한국화학연구원 화학산업고도화센터장 역시 고마운 사람 중의 한 분이다.

“혜택 받은 울산서 봉사·멘토링에 정진”

“지금까지 울산에서 많은 혜택을 받은 만큼 앞으로도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와 멘토링에 정진하겠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SK의 사회공헌(기업이윤의 사회 환원) 취지나 NCN의 설립취지와도 다를 바 없을 겁니다.” 박 대표가 회장을 맡고 있는 NCN(전문경력인사지원센터)은 전직 석유화학·자동차·조선 분야를 퇴직한 공장장 및 임원 약 150명으로 구성된 단체다. 울산시의 지원과 산업자원부의 관심 속에 내실을 탄탄하게 키워 나가고 있다.

“앞으로의 포부 말이지요? 왜 없겠습니까. 가장 큰 꿈은 울산에 가칭 ‘은퇴자 마을’(New Challengers Community)을 조성하는 일이다. 그의 포부는 논리가 정연하다. 첫째, 울산은 산업수도라는 점이다. 둘째, 울산에는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기업의 퇴직 공장장과 은퇴기술자들이 NCN을 만들어 울산과학대와 손잡고 기술사관육성사업을 꾸려나가는 등 여러 분야에서 지식과 경륜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감 있게 말한다. “울산시가 은퇴자마을을 멋지게 준비한다면 입주 희망자의 주류는 젊은 시절을 울산 산업현장에서 보낸 산업역군들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독특한 여건을 갖춘 지역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 겁니다,” 그는 은퇴자마을의 입주 적지를 ‘서생면 일원’으로 잡고 있다.

글= 김정주 논설실장·사진= 정동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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