未堂의 권력 예찬
未堂의 권력 예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8.0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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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시는 ‘국화 옆에서’만이 아니다. ‘견우의 노래’도 남겼다.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 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그러고 보니 내일(9일)이 음력 7월 7일, 칠월칠석날이다. 이날 남구문화원 야외공연장에선 울산문화사랑회와 연합뉴스가 같이 준비한 ‘칠석날 한마당’이 열린다. 또 범서읍 서사마을 물시불주막 앞마당에선 김종렬 시인과 태화강시낭송문학협회가 같이 호흡하는 ‘견우와 직녀의 사랑 이야기’ 그 두 번째 멍석이 깔린다.

한데 누군가가 찬물이라도 끼얹고 싶었던 것일까. 지난 5일자 어느 중앙지 1면 모퉁이엔 기분 묘한 기사가 하나 실렸다. ‘친일 222명, 해방 후 받은 훈장 440건’이란 제목의 논란 여지 다분한 기사였다. 명단 공개 주체는 ‘인터넷 독립언론’으로 자처하는 ‘뉴스타파’. 이를 받아 적은 중앙지는 기사에서 “222명을 직군별로 보면 군인이 53명으로 가장 많고, 문화예술계가 43명으로 뒤를 이었다”고 밝혔다.

문화예술계 인사로는 홍난파, 김기창, 주요한, 안익태, 유진오를 거명하면서 그를 그 맨 앞자리에 올렸다. ‘그’는 다름 아닌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시인이다. 문제의 중앙지는 2면에 이어진 기사에서 “정부는 문화예술계 친일인사 43명에게도 66건의 훈장을 수여했다. 이들 문화예술인은 자신의 분야에서 예술을 수단으로 삼아 일제의 지배를 선전하고 정당화했다”고 적었다.

많은 이들은 아직도 국어교과서에서 그의 대표시 ‘국화 옆에서’를 대하는 순간 가슴 멎을 듯한 정서적 감전(感電)으로 잠시 몸을 떨어야 했을 것이다. 그처럼 높아만 보이던 분이 친일(親日)의 앞잡이였고 해방 후엔 훈장까지 받았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 고민에 빠져들 즈음 어찌 알았는지 지인 한 사람이 놀라운 제보를 해 왔다. “그 양반,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하고 스스로를 친일파가 아니라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로 자처한 사실을 몰랐단 말입니까?” 그러면서 지인은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 ‘마쓰이 히데오(松井秀雄, 조선이름 印在雄)’를 추모한 미당의 시 ‘마쓰이 오장 송가’(松井 伍長 頌歌)도 SNS로 따로 퍼 날라 주었다. ‘오장’은 요즘 우리 군대로 치면 ‘하사’ 계급이다.

미당에 대한 지인의 평가는 냉정했다. 하지만 그의 풍요로운 인맥(人脈)에는 은근히 두려움(?) 비슷한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고은, 황동규, 백재삼 등 100명이 넘는 쟁쟁한 시인들을 등단시켰다. 가히 ‘미당 스쿨’을 거쳐 간 인물만으로도 한국문단은 풍성하다.…”

뉴스타파의 폭로나 8월 5일자 어느 중앙지의 보도를 보고 ‘100명도 더 넘는 쟁쟁한 시인들’이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지는 미지수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모른 체하고 그냥 넘어갈지…. 여하간 미당이 ‘양지(陽地)만을 즐겨 찾았다’는 평가나 ‘친일 못지않게 친독재(親獨裁)에도 일가견이 있었다’는 평가를 한 몸에 받는 것은 사실이다. 뒷받침할 만한 실화도 적지 않다.

신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56회 생일을 맞은 1987년 1월, 미당 그는 ‘처음으로’란 생일축시를 써서 바친다.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돌이켜보니 필자도 그 비슷한 찬사를 들은 기억이 있다. 1980년 8월,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졸지에 일자리를 잃은 얼마 후 어느 날 아침이던가. 부산의 한 시내버스 속에서 전라도 말투의 생생한 육성이 들려왔다. 미당이었다. 그는 ‘전두환 장군’을 이렇게 묘사했다. ‘단군 이래 대한민국 최고의 영도자’라고…. 한마디로 그는 권력 예찬자가 아니었나 싶다.

<김정주 논설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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