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의 미소를 보라
석굴암의 미소를 보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7.25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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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필자는 신혼여행을 경주로 간 적이 있다. 그땐 경주로 신혼여행 가는 것이 보통사람의 일이었던 같다. 5월 말 늦봄에 갔기에 경주의 들판은 황금빛 보리밭으로 그 아름다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특히 황금 보리밭을 배경으로 클로즈업된 첨성대의 모습은 정말 신비로웠다.

그곳을 출발하여 불국사를 구경하고 토함산의 석굴암으로 향했다. 가이드 택시기사는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면서 재미있게 한마디 한다. 정이 없는 부부가 이 토함산에 오를 때면 저절로 정이 생겨 금실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그만큼 산길을 구불구불하게 타고 올라간다는 말이다.

정신없이 정상에 오르자 석굴암 입구에 이른다. 바깥에서 보면 허술히 보이지만 석굴 안으로 들어가 불상을 보고 있노라면 우람한 크기에 압도되어 버린다. 특히 불상의 미소 지음은 오묘하고 신비로움 그 자체다.

천 년 전 석공은 미소 가득한 이 불상을 어떤 마음으로 새기고 있었을까. 생각키로는 붓다의 심심(深心)을 많이 깨달았을 것 같다.

신라 경주 어느 마을에 사내아이가 살았다. 그 아이는 머리가 크고 이마는 평평하여 마치 큰 성(城)과 같았다. 이름하여 말 그대로 대성(大城)으로 지었는데 그가 바로 석공 김대성이다. 어릴 때부터 너무나 가난하여 부잣집에서 일을 도와주며 살았고, 일하며 모은 재산인 조그마한 밭이랑 몇 줄을 불사(?事)에 쓰도록 했다.

김대성은 그 후 장성하여 부모의 은공을 갚는 데는 절을 지어 드리는 것이 공덕 가운데 최상의 공덕이라 생각했다. 그런 연유로 원력을 세운 뒤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하여 추선(追善)케 하였다.

우리나라의 불상에는 자비로운 미소를 띤 것이 유난히 많다. 그 중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 불상과 금동미륵보살 반가상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으로 손꼽힌다.

원래 불상은 간다라 지방인 지금의 파키스탄·인도 북부에서 제일 처음 볼 수 있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침략을 계기로 곳곳에 불상이 세워지면서, 불교에 귀의한 그리스인들이 ‘아르카익(Archaic) 미소’의 형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띠면서 고졸(古拙)하고 소박하면서도 깊은 정취나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표현을 말한다.

이러한 아름다운 ‘미소’는 일찍이 중국에서도 볼 수 있었으나 5세기 말부터 갑자기 미소가 사라지고 근엄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당나라 구법승과 사신들이 6세기쯤 한반도에 전파한 초기 불상에는 자애로운 미소를 완연히 볼 수 있다. 서산 마애삼존불상과 반가사유상이 대표적인 예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 23년이나 걸쳐 통일신라 문화 황금기에 건립된 동아시아 불교조각의 최고 걸작품이다. 석굴 주실 중앙의 석가모니 대불을 자세히 보라.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 주름의 생동감으로 불상 전체에 생명감이 넘쳐흐른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이어서 마치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소리를 전하는 것 같다.

바야흐로 오늘의 세상은 이제 인내조차 할 수 없는 속세가 되어버렸다. 사드(THAAD) 배치, 권력형 뇌물, 천륜에 거슬리는 행위, 난잡한 성윤리, 배신·보복정치 등으로 혼탁하기 짝이 없다. 이러한 우리의 어지러운 번뇌들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석굴암의 미소’야말로 붓다가 모든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물리친 승리의 순간, 큰 깨달음을 얻은 표현이지 않은가. 석굴암 성도상(成道像)의 미소를 생각하면서 세상을 관조해보고 해결방법을 찾았으면 한다.

김원호 울산대 국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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