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사설(社說) 감상법(鑑賞法)
신문사 사설(社說) 감상법(鑑賞法)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10.01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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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감상하고, 수필을 감상하고, 남이 써놓은 글을 읽으며 감상하게 되는데, 신문의 사설(社說)도 남이 써놓은 글이어서 감상한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감상하려면 해설을 참고하며 다시 읽어야, 감상하는 법을 배워야 제대로 감상한다. 신문의 사설도 감상하는 법을 알아야 제대로 감상한다. 여기서는 공부한다고 해둔다. 옛날에는 교양으로 매일 신문 사설을 읽어야 교양인에 끼었다. 요즘은 신문사 내에서조차도 편집하는 사람만 의무적으로 읽어주는, 그러면서도 오자(誤字), 탈자(脫字)를 바르게 잡아주지 못한다. 이럴진대 신문의 사설로 공부하라는 말 자체가 잘 못 집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일 전국의 신문들이 사설을 내보내고 있으면 감상법을 알고, 기왕에 읽는 것을 바로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 가지 초점을 제시한다. 특히 중·고등학교에서 대학입학 시험에 논술이 나오니까 입시준비용으로 사설을 학생들에게 읽도록 지도한다면 아래 내용을 참고해야 한다.

신문의 사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필자를 밝히지 않는다. 형식적으로 논설위원 개인 의견이 아니라 신문사의 의견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신문사의 의견은 어떤 형태로든지 독자의 의견을 수렴한 것이다. 비록 실질적으로는 사주(社主)의 의견이 반영될지라도 논설위원 개인의 이름으로 나오는 사설은 아주 드물다. 이것이 감상법의 하나이다. 언론의 자유를 외쳐도 논설위원이 신문사의 의견과 반대되는 사설을 쓴 일이 별로 없다. 편집권의 침해라고 낙하산 사장을 내쫓은 일은 기자가 했지 논설위원이 한 것은 아니다.

사설의 내용은 주로 원론적(原論的)이 아니면 아주 구체적인 사례로 주장을 펼친다. 사설에 ‘사적(私的)인 입장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원론적인 말이고, ‘엄창섭 울주군수의 유죄판결을 두고 동기동창인 논설위원 OOO가 사설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은 아주 구체적인 사례가 되는 것이다. 사설에 논증(論證)이 필요할 때, 대개 이런 원론적인 진술로 대신하고 만다. 불륜의 문제를 두고, 증거제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규범적 해석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주어진 사설을 누가 읽을 것인가, 누가 읽어주기를 바라고 썼는가 따져보아야 감상할 재미가 있다. 대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머릿속으로 읽을 사람을 상정(想定)하기 마련이다. 물론 예외(포스트모더니즘)가 있지만, 이 상(李 箱)도 오감도(烏瞰圖)를 쓸 때 누군가를 머리에 정했을 것이다. 때로는 막연하지만, 누군가를 정하면 대화체에 가깝게 써진다.

논설위원이 순수한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만으로 사설을 쓸 수 없다. 임어당(林語堂)의 말대로, 논설위원이 누에고치처럼 뽕잎을 먹고 비단실을 뽑아내듯이 자기가 소화시킨 지식을 쏟아내지는 못 한다.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온 지식을 짜깁기하여 사설을 쓴다. 요즈음의 인터넷이 자료제공을 잘 해준다. 혹시 원전(元典)을 읽고 쓴 사설의 주장이라면 더 좋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글의 내용이 논리적으로 잘 짜진 글이냐는 것이다. 문단(단락)개념조차 지키지 않는 사설은 논술문 지도에 방해가 된다. 특히, 버릇처럼 쓰는 콤마 의 과잉사용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여간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한다는 말이 여기에 통한다. 피천득 선생이 수필을 수필로 풀듯이 사설(社說)을 사설(社說)로 대신했다.

/ 박문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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