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 사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필자를 밝히지 않는다. 형식적으로 논설위원 개인 의견이 아니라 신문사의 의견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신문사의 의견은 어떤 형태로든지 독자의 의견을 수렴한 것이다. 비록 실질적으로는 사주(社主)의 의견이 반영될지라도 논설위원 개인의 이름으로 나오는 사설은 아주 드물다. 이것이 감상법의 하나이다. 언론의 자유를 외쳐도 논설위원이 신문사의 의견과 반대되는 사설을 쓴 일이 별로 없다. 편집권의 침해라고 낙하산 사장을 내쫓은 일은 기자가 했지 논설위원이 한 것은 아니다.
사설의 내용은 주로 원론적(原論的)이 아니면 아주 구체적인 사례로 주장을 펼친다. 사설에 ‘사적(私的)인 입장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원론적인 말이고, ‘엄창섭 울주군수의 유죄판결을 두고 동기동창인 논설위원 OOO가 사설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은 아주 구체적인 사례가 되는 것이다. 사설에 논증(論證)이 필요할 때, 대개 이런 원론적인 진술로 대신하고 만다. 불륜의 문제를 두고, 증거제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규범적 해석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주어진 사설을 누가 읽을 것인가, 누가 읽어주기를 바라고 썼는가 따져보아야 감상할 재미가 있다. 대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머릿속으로 읽을 사람을 상정(想定)하기 마련이다. 물론 예외(포스트모더니즘)가 있지만, 이 상(李 箱)도 오감도(烏瞰圖)를 쓸 때 누군가를 머리에 정했을 것이다. 때로는 막연하지만, 누군가를 정하면 대화체에 가깝게 써진다.
논설위원이 순수한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만으로 사설을 쓸 수 없다. 임어당(林語堂)의 말대로, 논설위원이 누에고치처럼 뽕잎을 먹고 비단실을 뽑아내듯이 자기가 소화시킨 지식을 쏟아내지는 못 한다.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온 지식을 짜깁기하여 사설을 쓴다. 요즈음의 인터넷이 자료제공을 잘 해준다. 혹시 원전(元典)을 읽고 쓴 사설의 주장이라면 더 좋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글의 내용이 논리적으로 잘 짜진 글이냐는 것이다. 문단(단락)개념조차 지키지 않는 사설은 논술문 지도에 방해가 된다. 특히, 버릇처럼 쓰는 콤마 의 과잉사용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여간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한다는 말이 여기에 통한다. 피천득 선생이 수필을 수필로 풀듯이 사설(社說)을 사설(社說)로 대신했다.
/ 박문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