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날의 감정수업
한여름 날의 감정수업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7.10 20: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주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덕수궁 미술관에 다녀왔다. 오래전부터 미술관에 기웃거리는 습관이 나도 모르게 생긴 것 같다. 미술에 대한 조예가 있어서라기보다 삶의 ‘감흥’을 조금이라도 느끼기 위해서다.

100년 전에 태어난 화가 ‘이중섭’을 기념하기 위한 큰 이벤트 ‘백년의 신화’가 열린 것이다. 유명한 그의 ‘황소’ 그림을 비롯해 무려 200여 점이나 되는 진품 그림과, 그의 가족끼리 주고받았던 여러 점의 편지가 리얼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학하는 동안, 같은 미술대학 학생 마사코를 우연히 만난다. 유학 후 한국에 돌아와 결혼하여 두 아들(태성, 태현)을 낳고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행복한 생활도 고작 5,6년밖에 되지 못한다. 비극의 한국전쟁으로 부산, 서귀포, 통영, 대구 등지로 떠돌이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고달픈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 훗날의 다복한 생활을 약속하고, 만덕(이중섭이 지어준 마사코의 한국명)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 친정에 가 있게 된다.

갤러리에는 보고 싶은 아내와 두 아들에게 보낸 그의 빛바랜 편지가 아직 남아있어 관람객들의 마음을 울린다. 구구절절한 내용을 읽고 있으면 너무나 ‘애절’하여 모두들 눈시울을 붉힌다. 불혹의 나이 40세에 보호자도 없이 외로이 숨지고 만다.

애상에 젖은 감상을 끝내고 시간은 좀 지났지만 점심을 먹어야 될 것 같았다. 시원하고 매콤한 메밀국수 생각이 나 맛집을 찾으려 나섰다. 덕수궁 건너편 북창동 먹자골목 쪽으로 건너가 한 바퀴 돌았다.

찾기도 답답한 순간, 마침 어느 메밀국수집으로 들어서는 낯선 일행과 조우했다. 대뜸 “이 집, 메밀국수, 맛있나요?”라고 공손히 물어보았다. “예, 맛있지요! 저희 단골이에요.” 친절하게 응대해 준다. 그래서 무조건 가게 안으로 따라 들어가니 그들은 또 우리를 자상하고 재미있게 안내해주는 것이다. “사장님! 이분들 처음 오셨는데 맛있게 해주세요!”라고. 우리 부부를 잠시 바라보고는 그들끼리 소근 소근 정담을 주고받는다. 잠시 후 식사를 끝내고는 맛있게 드셨냐고 인사치레까지 하면서 나간다. 그들의 ‘따뜻한’ 잔향(殘響)이 은은히 울리고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리가 먹은 메밀국수 값을 몰래 지불하고 가버린 것이다. 이런! 생판 모르는 행인인데 우리를 이렇게 환대해주다니! 혹시 우리들 이방인이 순수하고 착하게(?) 비친 것이 아닌지 은근히 짐작해보기도 한다.

장소를 좀 바꾸어 일본에서의 한여름 일이다. 일본의 저명한 교수가 공개강의 할 때다. 옆 좌석에 앉은 한 일본 대학생의 성실하고 진지한 수업태도에 감동하여 파한 뒤 차 한잔을 하자고 권유했다. 대학 앞 커피전문집.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제법 안락한 분위기에서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져 갔다. 끝난 후 카운터에 한국에서 하던 대로 자연스레 돈을 지불했다. 그런데 그 일본학생은 냉큼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선생님! 왜 더치페이를 하지 않는지요?”라고…. 깜짝 놀랐다. 그 학생은 ‘인정’ 많은 우리의 따뜻한 문화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나의 부주의로 열쇠뭉치까지 달려있는 지갑을 고스란히 잃어버렸다. 멍하니 있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주웠는데 잃어버리지 않았냐고 한다. 잃어버린 반나절 동안의 허탈함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요동친다. 현금카드의 분실 신고뿐 아니라 여러 신분증 발급이며 기타 당장 해야 할 일로 괴로웠는데 이렇게 뜻밖의 은혜를 준 사람이 나타났으니 큰 행운이 아닌가? 탈 없이 돌아온 나의 빵빵한 지갑 속에는,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우리의 ‘인정’까지 꽉 채워져 돌아왔으니 한여름 이 날은 정말 보배로운 하루였다.

김원호 울산대 국제학부 명예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