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협상에도 ‘예의’는 있다
노사협상에도 ‘예의’는 있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7.10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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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지 않는 사실(事實)을 가끔 보고 듣는다. 그럴 때마다 자기 눈과 귀를 의심하기까지 한다. 엊그제 현대차 교섭장에서 일어난 일 역시 쉬이 믿기기 않는다. 하지만 사실이다.

노조도 <교섭속보>를 통해 ‘전원퇴장’이라고 밝혔다. 이 날 교섭에서 노사는 노조요구안 설명회 및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이어 사측이 회사요구안 설명을 하려하자 노조측 교섭위원 모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교섭장을 빠져나간 것이다. 더욱 믿기지 않는 것은 다음날 가진 교섭에서도 전날과 똑 같은 일이 벌어졌다. 쉽게 말해 얘기를 듣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연이틀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돌발적인 상황이 아닌 의도된 것임이 분명하다.

교섭의 기본 예의마저 무시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에 회사측 교섭위원들은 그저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다.

나그네가 산길을 가다가 값비싼 방울[鈴]을 봤다. 웬 횡재냐며 방울을 들려고 했으나 너무 무거워 깨뜨리기로 했다. 주변에 있던 큰 돌을 들고 힘차게 내리쳤다. 굉음이 울렸다. 깜짝 놀란 그는 길섶에 자라던 쑥을 뜯어 자기 귀를 막았다. 그리고 다시 돌을 내리쳤다.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안심한 그는 계속 돌을 내리쳤다.

잠시 후 동네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 뒤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친다’는 뜻인 엄이도령(掩耳盜鈴)의 얘기다.

진시황의 실부(實父)라고도 하는 여불위가 “잘못된 글자 한 자라도 찾아내면 천금을 주겠다.”(一字千金)고 기염을 토했을 정도로 자신만만했던 사론서(史論書)인 <여씨춘추>에 나온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서로 의논하고 절충하는 것을 교섭 또는 협상이라고도 한다. 교섭이든 협상이든 기본전제는 상대방 얘기를 듣는 것이다. 입만 여는 게 아니라 귀도 함께 열어야 한다. 이를 부정하면 교섭은 불가능하다. 내 얘기만 실컷 하고 “어쩔래?” 하는 것은 동네 불량배들이나 하는 저급하고도 일방적인 협박내지 공갈이다. 교섭은 어린아이도 한다. 갖고 싶은 물건을 요구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요구가 무엇인지도 헤아린다는 것이다. 이걸 무시하면 막무가내식 ‘투정’에 불과하다. 물론 노조가 회사측 요구사항을 듣지 않겠다고 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임금피크제를 비롯한 2015년 단체교섭 합의 이행 ▲품질향상과 인력·차량의 유연성 확보 등을 위한 위기대응 공동 테스크 포스 팀(TFT) 구성 ▲금속노조만이 유일 교섭단체임을 못 박는 등의 위법·불합리한 단협조항 자율시정 권고 개정안을 회사가 거론할 것임은 이미 회사가 노조에 발송한 공문을 통해 예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15개에 이르는 노측 요구사항은 회사가 듣기 좋았을까? 이날은 마침 노조가 출정식을 갖기로 했던 날이었으나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로 연기를 했다. 해마다 노조는 교섭을 앞두거나 진행 중에 ‘출정식’이란 의식을 갖는다.

그런데 꼭 ‘출정식(出征式)’이라는 말을 써야 하는 지도 이참에 언급하고 싶다. 출정식은 원래 전쟁(정복)을 하러 가기 전에 군인들이 갖는 모임에서 나온 말이다. 좀 섬뜩하지 않은가? 사실 ‘교섭’과 ‘전쟁’은 전혀 상반되는 개념이다. 전쟁은 무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겠다는 것이 전제된다. 피를 흘리는 참극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교섭은 말과 논리로 상대를 설득해 내 뜻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여기엔 윈-윈 전략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평화적인 ‘교섭’을 하면서, 비평화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출정식’이란 말을 쓰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교섭은 내가 듣기 좋고 유리한 소리만 듣기 위한 자리가 절대 아니다. 더욱이 노사 교섭은 ‘함께 살자’는 공감대가 있다. 그래야 한다. 회사는 출정을 해서 정복해야 하는 적군이 아니다. 단지 입장이 조금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노사 교섭은 정말 중요한 자리다. 당연히 상대에 대한 예의(매너)를 지켜야 한다. 협상 중에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는 것은 무례이자, 상대에겐 (논리적으로)‘졌다’는 신호로 여겨질 수도 있다. 국내 굴지 대기업의 노조가 이 같은 실수(?)를 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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