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자원으로서의 왜성(倭城)
관광자원으로서의 왜성(倭城)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7.06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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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을 가로질러 흐르는 태화강이 동천과 합수되는 지점에 조금 못 미친 곳에 야트막한 구릉이 있다. 예전에는 학성공원이라고 했다. 요즘은 울산왜성(倭城)이라고 부른다.

구릉의 높이는 해발 50m 남짓하다.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삼산벌과 울산만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략요충지이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은 이곳에 성을 쌓았다. 그래서 왜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진격했던 왜군이 정유재란 때는 그렇지 못했다. 전란을 겪으면서 조선군의 전열이 어느 정도 정비되기도 했고 명의 원군도 있었기 때문이다.

왜군은 전투가 장기화될 것에 대비해 그들의 주둔지를 확대해 나갔다. 그때 울산왜성도 축성됐다. 축성을 지휘한 장수는 당시 서생포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였다. 가토는 축성에 필요한 석재를 울산읍성을 허물어 조달했다. 이곳에서는 두 차례의 큰 전투가 벌어졌다. 1차 전투는 울산왜성이 채 정비되기 전에 발발했다. 조명연합군이 축성공사중인 왜군을 급습한 것이다.

왜군은 농성전에 들어갔지만 비축된 식량도 없었고 식수도 없었다. 성 외곽에 있던 우물들은 조선군이 모두 돌로 메웠다.

서생포왜성에 있던 가토가 전투가 한창인 울산왜성에 잠입해 독전했다. 전투는 승자도 패자도 없이 소강상태로 끝났다. 하지만 이 전투는 왜군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가장 고전한 육전으로 기록된다.

이 전투에는 울산의병들도 참여했다. 이 전투에서 세운 울산의병들의 공로로 전란이후 울산은 도호부로 승격됐다. 동래도호부가 패전을 책임으로 현으로 강등됐던 것과 대조적이다.

전쟁이 끝나고 구마모토(熊本)로 돌아간 가토는 새로 성을 쌓으면서 우물을 170여 곳이나 팠다. 다다미도 고구마순을 이용해 제작했다. 성내의 나무는 모두 유실수로 채웠다. 가토는 울산왜성에서 고전했던 경험을 살려 비상시를 그렇게 대비했다.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4월 이 성은 울산공원으로 단장돼 개장됐다. 당시 울산면은 성대한 개장식을 열었다. 하지만 이 개장식에 참석을 거부한 시민단체가 있었다. 그 전해에 발족한 울산민우회였다. 울산민우회는 조선인 면민들이 그 동안 은둔적이고 방관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것에 대해 반성하면서 조선인 면민들의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하기 위해 결성됐다. 울산민우회는 울산면이 울산공원을 조성한 이유를 왜군의 유적지를 성역화하려는 의도로 파악했다.

한반도에 왜성은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을 포함해 30여개가 남아 있다. 일인들은 일제강점기에 이 왜성들을 사적으로 지정해 관리했다. 이 사적들에 대해 해방 이후에 논란이 있었지만 여전히 문화재로 관리됐다. 울산왜성은 현재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돼 있다.

정유재란이 끝나자 일본열도는 도쿠가와(德川) 바쿠후 체제로 정비됐다. 1세기에 걸친 센코쿠(戰國)시대가 종식되고 에도(江戶)시대가 열린 것이다. 참전했던 장수들은 에도 바쿠후의 쇼군(將軍)으로부터 다이묘(大名)로 임명받고 그들의 영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영성도 대부분 이 시기에 축성되거나 개축됐다. 다이묘들은 새 성을 축성을 하며 조선에서의 전투경험을 충분히 반영했다.

그래서 일본의 성곽 연구자들이 한국에 있는 왜성을 주목하는 것이다. 일본성의 원류가 왜성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서생포왜성을 살피던 어는 일본인 연구자는 성벽의 곡면을 보고 “이것이 가토의 곡선입니다”라며 흥분했다. 구마모토성의 특징인 곡선형 석벽을 일본에서는 특별히 ‘가토류(加藤流)’라고 분류한다. 가토류의 원형이 서생포왜성에 있는 것이다. 왜성을 일인들의 유적지로만 볼 일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현장인 것이다. 역사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정유재란 당시 벌어졌던 울산성전투는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과 중국인들에게도 흥미 있는 소재이다. 기념관 건립 효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강귀일 취재2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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