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고(考)
소주고(考)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9.29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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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燒酒)는 탁주, 청주와 더불어 한국3대 전통주 중 하나다. 지금 많이 마시고 있는 소주는 전통적 증류주가 아니고 주정(酒精)에 물, 향료를 섞은 희석주다.

증류 소주는 고려말 몽고군이 한반도에 침입해 들어오면서 주조되기 시작했는데 맛이 강하고 도수가 높았다. 몽고병들은 추위를 막고 전투력을 상승시키는 자극제로 ‘아락주’를 가죽 술병에 담아 허리에 차고 다니며 수시로 마셨다고 한다. 이 아락주는 징기스칸이 세계를 제패하는 과정에서 페르시아로부터 알콜 증류법을 배워 중국과 고려에 전파시켰는데 우리나라에 자리잡은 것이 소주의 효시다.

고대 아랍에서 증류주를 ‘아락’이라했고 인도에서는 ‘알락’이라 했는데 지금 영어의 ‘알콜’과 비슷한 발음임을 엿 볼 수 있다. 이 말이 몽고로 옮겨와 ‘아리킬’, 만주어로 ‘알키’라고 한 것을 보면 소주의 기원은 서역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페르시아의 소주 증류법은 동방으로 들어와서 ‘아리킬’이 됐고 12세기 십자군 원정의 영향으로 유럽쪽에 전해지면서 포도주를 증류한 브랜디, 맥주를 증류한 위스키로 발전하게 됐다. ‘브랜디’란 말이 ‘불태운 포도주’란 뜻의 네덜란드어 브랜드베인(brandewijn)에서 비롯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13세기 초 고려를 굴복시킨 몽고는 개성에 누루하치(총독의 일종)와 군대를 주둔 시켰고 경북 안동지방엔 병참기지를 건설했다. 주둔 몽고병들에게 아락주를 공급키위해 술을 만든 것이 한국 소주의 근원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개성소주와 안동소주가 유명했던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과 무관치 않다.

근세까지도 개성지방에서 소주를 아락주라 했고 평북지방에서는 ‘아랑주’라 불렀다. 안동지방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북 영천에서는 최근까지도 소주를 ‘아래기’라 한 것만 봐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 해 주고있다.

그러나 당시 소주는 순수한 곡식으로 만들어 값이 비쌌기 때문에 귀족층 술이었고 서민들은 대부분 막걸리를 마셨다. 서민들은 소주를 주로 ‘약용(藥用)’으로 사용했는데 ‘약주’란 이름이 생긴것도 이에서 비롯됐다. 조선조에 들어 오면서 소주가 ‘귀족술’에서 벗어나 일반화 돼가는 경향을 엿 볼수 있다.

조선 성종 21년(1490년) 사간 조효동이 “세종때는 사대부 집에서도 소주를 사용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요즘은 보통 연회에도 일반민가에서 만들어 음용하는 것은 극히 사치스러운 일이니 소주 제조를 금지할 것”을 임금에게 주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소주가 일반화 되면서 술 마시는 방법도 다양해졌다. 이조때는 소주가 독해서 술잔을 작은 것으로 정하자는 진언을 왕에게 한적도 있으며 소주 한잔에 냉수 한잔을 마시는 음주법 -요즘의 언더락- 이 유행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후 조선에 고추가 소개되면서 ‘소주에 고춧가루’를 타마시는 습속이 생겨 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소주시대’ 개막은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절인 1960년대부터라고 봐야한다. 60년대 식량난이 닥치자 쌀을 원료로 하는 소주 제조를 금지했고 지금의 25도 짜리 희석주가 나왔다. 박 대통령이 ‘노동자, 서민들이 회포를 풀수있게’ 소주가격을 동결시키면서 본격적인 서민술, 값싼 술로 자리잡게 됐다고 보면 된다.

이번에 울산공장을 기공한 무학소주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경남지역을 장악해 온 소주생산 주류업체다. 고려 충렬왕때 려·몽 연합군이 일본정벌을 위해 합포-지금의 마산-에 원정대 출정기지를 설치하면서 병사들에게 식수를 공급키위해 몽고정(井)을 팠다. 원래 고려정(井)이었던 이 우물물이 맛 좋기로 소문나면서 간장, 소주를 빚어 몽고 간장, 무학소주가 탄생한 것이다.

고려에서 발원한 소주공장이 울산에도 들어선다니 술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 같다.

/ 정종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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