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 한 장 속의 추억
흑백사진 한 장 속의 추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4.27 21: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 장소를 관찰 또는 고찰할 때, 그것을 바라보는 방향이나 생각하는 입장이 사람마다 다르다. 울산 죽도(竹島)가 그러하다. 죽도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방도리 산 13번지에 있는 면적 1만5,천48㎡, 둘레 440m의 섬이다. 이름은 춘도(椿島)·목도(目島)·동백도(冬栢島) 등으로 불린다. “이 섬을 동국여지승람에는 ‘동백이 섬에 찼으므로 동백도(冬栢島)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또한 죽도(竹島)라고도 하여왔으나 죽도는 매암동(梅岩洞)에 따로 있어 서로 분별을 잘못한 데서 온 혼동으로 봐야 할 것이다.” 『울산지명사』(1986, 울산문화원)의 기록이다.

울산이 고향인 사람들은 죽도에 대한 추억이 한결같다. 횟집, 우물터, 사찰까지 다양하게 기억한다. 특히 로맨스 사연은 시작은 거창하다가도 끝에 가서는 꼬리를 내린다. 죽도를 다녀온 기억, 현장을 남긴 사진작가, 그리고 한 장의 죽도 사진을 떠올리며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난다.

“목도는 눈처럼 생겼다 해서 ‘눈섬’이라고도 부른다. 춘백, 동백, 후박, 사철, 다정큼, 송악 등 상록수종이 많아 1962년 천연기념물 65호로 지정된 섬이다. 동물과 꽃, 나무 등 자연을 사랑하는 큰스님(香谷, 1912 ∼19 78)이 특별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택한 곳이다. 목도의 상록수림은 예부터 유명해 관광객이 들끓었다. 큰스님과 간 날도 사람이 엄청 많았다. 섬에 있는 유일한 건물인 춘해사라는 절에는 나이 든 대처승이 살고 있었다.…큰스님이 열반하신 뒤, 목도의 기억을 되살리러 가고 싶었다. 가보려고 하니 1992년부터 20년간 일반인은 출입금지가 돼 있었다. 상록수림을 보호하기 위해 문화재청이 정한 것이다.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려고 2021년까지 더 연장했다고 하니 다시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기장의 묘관음사에 주석한 향곡 스님 일행이 죽도를 구경한 기억을 경주의 한 사찰에서 수행하는 범념 스님이 이야기하고 있다. 현재 죽도는 춘해사의 흔적도 대처승의 기억도 사라지고 없다. 다만 떨어진 동백꽃을 내려다보며 애타게 지저귀는 동박새의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다.

울산사진작가협회 회원인 권오룡 작가의 사진전 ‘온산의 어제와 오늘’을 관람했다. 작가가 찍은 과거의 죽도 사진을 마주하는 순간 추억의 새싹이 조금씩 돋아났다. ‘춘도’라는 말만 꺼내면 울산사람의 가슴속에는 금세 오색 물결이 일어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에 침이 마른다. 온산의 어제가 습지의 두루미와 죽도의 동백꽃이었다면 온산의 오늘은 공단과 접근할 수 없는 죽도다. 두루미는 회학(回鶴)으로, 동백꽃은 문화재청의 접근금지 흔적으로 남았다. 대대로 온산 회학 습지를 터전으로 삼았던 정수리 붉은 두루미는 이 봄 춘도섬 붉은 동백으로 피어 목도와 회학을 오가는 혼유(魂遊)의 날갯짓으로 너울거릴 것이다.

64년 전의 죽도가 배경인 한 장의 흑백사진을 찬찬이 들여다본다. 목도에서 찍은 봄놀이로 짐작되는 단체사진이다. 어릴 때 어머니의 설명으로 자주 듣고 보았지만 무심코 지나쳤던 사진이다. 작년 10월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형이 울산의 동생에게 필요할 거라며 건네준 것이다. 이 사진이 새삼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10년 전쯤 죽도에 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진의 배경은 바닷가 바위였는데 일제히 여성들은 정면으로, 남성들은 오른쪽을 바라보는 것이 이채롭다. 사진 아래쪽에는 ‘於竹島에서 4285.5.18.’이란 글자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서기로 환산해보니 1952년 5월 18일이다.

필자의 고향은 경남 양산시 동면 내송리다. 아마도 내송마을 사람들이 봄놀이 마당으로 울산의 죽도를 선택했나보다. 장구, 하모니카, 술주전자, 꽹과리도 있는 것으로 보아 상춘놀이가 분명하다. 아버지 나이 28세, 어머니 나이 25세 때다. 아버지는 21살에 장가가고 어머니는 18살에 시집왔다. 무릎에 앉은 아기는 셋째이자 3살 터울인 둘째 누나다. 2살인 어린 누나는 어머니 무릎에 앉아 왼손가락을 입에 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사진에는 마을 주민이 44명이나 등장한다. 여성 12명, 어린아이 12명, 어른 남자 18명, 교복차림의 중학생 1명, 초등학생 1명이 눈에 띈다. 뒤쪽에는 지나가는 행인 1명과 멀리서 바라보는 남자 1명도 사진에 잡혔다. 초여름이라 밀짚모자도 보인다. 남성들은 노타이도 있지만 대부분 넥타이에 양복차림이다. 여성 12명의 공통점은 흰 치마저고리 차림이다. 이들 중 4명만 예외일 뿐 나머지 8명은 무릎에 같은 또래의 아기를 앉혀 놓았다. 훌쩍 커 버린 아이들은 엄마 대신 아빠가 안고 있다. 재미난 것은 한 사람은 막걸리 주전자를 기울여 따르는 시늉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양푼이 술잔으로 받는 시늉을 하는 장면이다. 여자 아기는 모두 옷을 입혀 놓은 반면 남자 아기는 모조리 아랫도리를 벗겨놓은 점도 흥미롭다. 담배를 입에 물고 꽹과리 치는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모처럼의 야외 나들이여서인지 남녀 모두 한껏 멋을 부린 모습이다. 그날 모두가 즐거웠으리라. 크게 취한 사람도 있었으리라. ‘벌(罰)은 늦게라도 반드시 찾아온다’는 노자의 말씀처럼 오래된 사진은 반드시 향토사 연구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조류생태학박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