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 (各自圖生)
각자도생 (各自圖生)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3.27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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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의 달인’으로 추대할 만한 저명인사가 울산에도 있는가? 답은 “있다” 쪽이다. 4선의 문턱에서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최병국 전 국회의원이 바로 그런 저명인사 중 한 분이다.

19대 국회의원 선거(4·11 총선)를 앞두고 있던 2012월 2월부터 3월 사이, 당시 3선 관록의 최병국 의원은 기자 회견이나 간담회가 있을 때면 으레 네 마디 말을 곧잘 구사하는 ‘사자성어(四字成語)의 달인(達人)’이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그의 사자성어 구사 실력은 가히 달인의 경지에 올라가 있었다.

울산 남구갑 선거구에서 예비후보로 등록한 직후인 그 해 2월 하순, 그가 선보인 첫 사자성어는 ‘문전성시(門前成市)’였다. 이 말은 곧바로 두 가지 해석을 낳았다. 하나는 추종세력들의 잦은 선거캠프 출입을 의미했다. 당시만 해도 그는 ‘울산의 정치적 좌장(座長)’ 소리를 들을 정도로 카리스마도, 영향력도 참 대단한 인물이었다. 다른 하나는 여야를 불문하고 정치적 도전자들이 그의 12년 정치아성(政治牙城)을 함락시킬 목적으로 집단 포위한 상황을 의미했다.

그러다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중앙당 공직자후보추천위원회가 남구갑 선거구를 ‘전략공천지역’으로 정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애써 감추지 않은 채 ‘일망타진(一網打盡)’이란 사자성어를 보란 듯이 꺼내 보였다. 도전자들을 능히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읽혔다. 그러나 이 말도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며칠 후 그는 “당했다”는 말과 함께 ‘망연자실(茫然自失)’이란 사자성어를 구사했다. 전략공천지역 선정이 실은 자신을 배제하기 위한 함정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 해 3월 8일, 그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자간담회 자리를 스스로 마련했다. 그 자리에선 사자성어 2건이 동시에 쏟아져 나왔다. 하나는 손자병법에 나온다는 ‘분속가모(忿速可侮)’였고, 다른 하나는 어원 불명의 ‘각자도생(各自圖生)’이었다. ‘분속가모(忿速可侮=성을 자주 내면 모욕을 당한다)’란 말은 공천 탈락의 억울함을 이야기하는 수단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을 도운 죄’밖에 없다”는 것이 친이계(親李系)로 자처하던 그의 항변이었다. 자신을 ‘선비’에 비유하면서 이런 말도 남겼다. “선비에게 목을 칠지언정 욕되게 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 나흘 뒤 그는 탈당을 선언했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엔 ‘정계은퇴’의 도장마저 찍고 만다.

‘각자도생(各自圖生=제각기 살 길을 도모한다)’! 이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의미의 폭이 매우 넓을 수 있다. ‘탈당→무소속 출마’의 길을 선택한 정치인들에겐 이만큼 걸맞은 사자성어도 드물지 싶다. 또 최 전 의원의 경우에서 보듯이 선거판 지지자들에겐 “각자 알아서 처신하라”는 ‘사슬 풀기’ ‘노예 해방’(?)의 복음(福音)으로도 들릴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열성 지지자들은 그의 정계은퇴 선언 후 ‘헤쳐모여’를 실행에 옮겼다. 대부분은 새로운 권력의 실세 앞에서 ‘영원한 충성’을 다시 맹세했다. “한때의 반군(反軍)은 더 이상 반군이 아니다. 오직 정부군(政府軍만 있을 뿐”이란 정치판의 격언을 하나 새로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이다.

4년 전과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예단컨대, 결코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등을 돌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제의 ‘존경하는 위원장님’이 오 늘의 ‘정치브로커 배후세력’이 되고, 어제의 ‘당원동지’가 오늘의 ‘정치배신자’가 되는 마당에, 의리고 나발이고 찾아서 뭣에 쓰겠나. 각자도생만 잘하면 될 것이지….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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