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선생] “철아, 철아, 우리 철아” 49
[동강선생] “철아, 철아, 우리 철아” 49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9.18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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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보건소서 2년의 임무를 마치고 전역
서울의원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밤낮 정성

‘고의로 군 복무를 회피한 것이 아니라 지병인 폐결핵으로 면제를 받았던 나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서슬이 퍼런 군사독재시절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긴 혁명정부가 당시의 병역 기피자를 공적인 차원에서 정리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법을 적용하는 과정에 나 같이 억울한 사람이 나올 만큼 의사로서 군복무를 마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었다. 경상북도 울진의 보건소에서 꼬박 2년을 보건소장으로 부임하여 맡은 바 임무를 마치고 전역했다. 민간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2년이라는 공백은 엄청났다. 비워두었던 진료실의 문을 다시 열고, 서울의원을 정상궤도로 올려놓기 위해 밤낮으로 정성을 쏟았다. 환자들을 최선으로 대하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려 애를 썼다. 다행히 나의 정성이 통했는지 서울의원은 금세 제자리를 잡고 다시 환자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때쯤 울산에 개발열풍이 불어 닥치고 ‘현대조선소’라는 큰 기업이 생겼다. 당시의 조선소는 전문 지식도 없이 외국에서 선박을 수주 받아 무모하게 선박을 건조하기 시작했고, 나는 현대조선소의 의무실 책임자로 발탁되어서 서울의원 직원 몇 명을 ‘현대조선소’에 파견하였다.

조선소 초기에는 기술자 없이 선박을 건조하다 보니 매일 부상자들이 발생했다. 의무실을 책임지고 있던 나는 하루 중 절반을 의무실에서 배를 만들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했고, 부상이 심한 경우는 기본적인 처치만 하여 서울의원으로 이송시켰다.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환자들을 치료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많은 사상자를 내며 주먹구구로 작업을 하던 조선소에 외국의 전문 기술자들이 들어오고, 우리나라 공과대학 출신의 전문가들이 합세하자 현대조선소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이 대거 투입되어 선박건조와 공장을 함께 지어나가고 산을 깎아서 바다를 메워나갔다.

검푸른 동해바다의 파도가 출렁이던 방어진의 앞바다가 산을 깎으며 나온 바윗돌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며칠에 하나씩 산 하나가 깎여지고, 그 자리에 공장이 들어서고 사원 아파트가 들어서는 모습은 울산의 토박이들에게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이때 현대그룹은 방어진 일대를 사업 확장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즉, 공업단지로 선포되었다. 이어서 새로 조성된 공업단지에 석유화학을 중심으로 한 공장들이 세워졌다. 울산에는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구하러 온 사람들로 넘쳐났고, 모든 영업장은 활기차게 돌아갔다. 내가 운영하던 서울의원도 많은 환자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정주영 회장이 울산에 머무를 때에는 정 회장이 숙소로 사용하던 ‘영빈관’으로 찾아가 정 회장의 건강을 보살펴드렸다. 그 당시 정 회장은 3일에 한 번씩 새벽길을 달려와 방어진의 공사 현장을 직접 시찰하며 직원들을 만나 의견을 수렴하고 서울로 올라가셨다.

그만큼 건강하셨다. 손과 발이 무척 크셨다. 평소에도 속도를 즐기기로 소문난 정 회장이 이른 새벽 서울에서 출발하여 울산에 도착하기까지는 채 4시간도 걸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당시의 도로여건을 생각하면 보통 사람의 체질로는 감당 못할 일이었다.’

<동강 선생의 자서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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