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통폐합, 그리고 허문도씨
언론통폐합, 그리고 허문도씨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3.20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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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8월 15일, 광복 35주년 기념일이었지 싶다. 이날따라 부산 K신문 편집국은 무거운 저기압이 누르고 있었다. 침묵을 깨고 중년 나이의 편집국장이 말문을 열었다. 윗선 지시라며 시키는 대로 따라 하라고 요구했다. “OO신문사를 그만두겠다”는 소위 ‘자퇴서’를 쓰는 일이었다. ‘일신상의 이유’ 외에 달리 갖다 댈 문구는 없었다.

이날, 자퇴서를 같이 써야 할 ‘사회부 차장’ 조갑제는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두어 달 전 이미 ‘해직(解職)’을 통보받은 탓이었다. 그의 해직 사유는 바로 ‘괘씸죄’였다. 신문기자 조갑제는 신문사 고위층의 ‘현장취재 불가’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가(病暇)를 얻어 ‘광주폭동(=5·18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장으로 잠입한다. (그 무렵 조 기자의 동생은 광주 모 대학교의 의대생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시민군’의 시각으로 기사를 써서 어렵사리 본사로 보낸다. 기사는 곧바로 구겨져 휴지통으로 들어갔고 그는 계엄당국으로부터 ‘要주의 인물’ 낙인이 찍힌다.

봄철부터 전국이 시끄러웠던 1980년, 신군부(申軍部)에 의한 부산지역의 언론통폐합은 그런 모양새로 막장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 직전까지도 석간(夕刊) K신문의 주요기사는 신군부가 파견한 군정보당국자의 사전검열을 거치게 돼 있었다. 검열을 받으러 부산시청을 몇 차례 들락거릴 때만 해도 ‘폐간(廢刊)’이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단어였다. “참 순진했었지.” 깨달은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지나간 버스, 손 흔들기’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라던가.

그렇다고 전혀 손을 안 써본 건 아니었다. 들리는 소문은 시시각각 흉흉해져 갔다. ‘자퇴서’ 쓰기 얼마 전 어느 늦은 밤, 작심을 하고 다이얼을 돌렸다. 용케 알아낸 ‘권력실세’의 서울 자택 전화번호였다. 군 입대 전, 재학 중에 몇 달 사귄 적 있는 그 댁 안방마님의 목소리는 의외로 쌀쌀맞았다. 언론통폐합(一道一紙) 소식이 사실인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양쪽으로 가까웠던 한 지인은, 그날 밤 권력실세는 통화 소리를 엿들을 수 있을 만큼 지근거리에 있었다 하더라고 전했다.

‘언론 저승사자’란 별명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신군부의 권력실세 허문도씨. 그도 백세수(百歲壽)는 누리지 못하고 지난 5일 이승을 하직했다. 언론매체들은 짧게나마 그의 죽음을 타전했다. 그러나 기사 제목은 ‘별세(別世)’, ‘사망(死亡)’의 비율이 엇비슷했다. 한 중앙지는 그의 부인 이름을 잘못 표기하기도 했다. ‘잊혀진 인물’ 정도로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호사가들의 사후평(死後評)은 대체로 악의에 찬 것들이 많았다. 혹자는 ‘전두환의 괴벨스’란 생전의 별명을 재탕하듯 사용했다. “당시 전국의 신문사 11개, 방송사 27개, 통신사 6개 등 44개 언론매체가 통폐합의 대상이 되었다. 허문도를 ‘전두환 정권의 괴벨스’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해직언론인으로 짐작되는 이 필자(필명 ‘올드 코난’)는 허씨를 가리켜 최악의 저주마저 서슴지 않았다. “그는 5공화국 실세로서 언론인들에게 피눈물을 쏟게 만들었다.…그에게 피해를 당한 많은 언론인과 국민들에게 죽는 순간까지 사과를 하지 않았다.…장례식도 아깝다. 그의 무덤에 침을 뱉고 싶다.”

허문도씨. 언론인 출신인 그는 제5공화국 당시 ‘한참 잘나가던’ 문관(文官)이었다. 신군부 실세 ‘스리 허(3許)’ 중에서도 무관(武官) 출신 허삼수·허화평씨를 제치고 전두환 대통령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부귀영화는 그뿐이었다. 고교 동문인 허삼수씨가 부산에서, 허화평씨가 포항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단 것과는 달리 그는 고향 고성에서 출마했다가 쓴 잔을 들고 주저앉고 만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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