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꽃핀 방어진회 ④`
일본에서 꽃핀 방어진회 ④`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2.25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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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진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 속의 일본마을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우선 시가지의 건물들이 모두 일본식인데다 좁은 골목길이 특히 그러했다. 골목길 이름도 ‘히나세골목’, ‘핫찌켄나까야’, ‘청녹창’, 해안가라는 뜻의 ‘우라하마’, ‘함안에’라고 불렀고 건착선을 ‘겐짜쿠’로, 트롤선을 ‘뎅구리’로 부르는 등 일본식 이름들이 넘쳐났다. 일본인들이 모두 떠난 후에도 방어진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건물과 공장 등을 그대로 점유해서 사용했고, 항만도 어업조합도, 시장의 점포도 노점상도 그 주인만 바뀌었을 뿐 길들여진 이용방식은 일제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1970년대 초부터 현대조선소가 미포만에 들어서면서 유입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해 주택의 수요가 늘어나자 주택의 수선과 개량, 신축 등이 진행되면서 도시의 구조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보기조차 어려워졌다.

일본에 있는 방어진회의 ‘이시모토 가츠에’씨는 일제 때 방어진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음식을 익히고 난방을 할 때 땔감은 장작이나 숯, 갈탄 등을 사용했다. 남목 사람들이 장작이나 솔잎, 숯 등을 이고지고 팔러 오면 일본인 중매상은 이를 사들여 쌓아두고 적당량을 헐어서 일본인들에게 되팔았다. 현금이 없으면 외상으로 주었다가 뒤에 수금하기도 했다. 특히 남목 사람들은 20리가 넘는 먼 길을 나무를 이거나 지고 와서 팔았지만 자녀의 교육열만은 대단히 높은 것 같았다고 ‘이시모토 가츠에’씨는 술회한다.

남목 마을은 동구의 역사 속에서 늘 행정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에 병마를 기르던 목장의 관아가 그곳에 있었으니, 요즘말로 하면 ‘특수군수산업단지’의 관리공관이 거기에 있었던 셈이다.

말은 일반 가축처럼 그냥 놓아서 먹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망아지 때부터 사람이 탈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야 했고, 맹수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는 포수와 말발굽에 편자를 만들어 박아주는 대장장이가 있어야 했다. 병을 치료하는 마의(馬醫)와 평소에 말을 점검하는 점마청의 관리가 있어야 했고, 수많은 말에게 물을 먹일 수 있도록 못(음수지)을 관리하고 수리하는 사람도 있어야 했다. 또한 마성이 무너지지나 않았는지 점검하는 성지도감과 말의 먹이인 건초를 가을부터 봄까지 준비하는 건초꾼들도 있어야 했고, 관아의 재산과 행정 일반을 관리하는 지방관도 있어야 했다.

때문에 목장에는 사양하는 말 숫자보다 관리하는 사람 숫자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목장에도 중앙행정의 육조를 모방한 ‘육방’을 두어서 목관이 그 수령 노릇을 했고, 문자를 아는 지방관들이 그를 보좌했다. 비춰보면, 목장의 감목관이 거주하는 관사를 비롯한 관아 건물이 모두 남목에 모여 있었으니 감목관이나 지방관들을 보고 대할 기회가 많았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자식들의 장래와 신분을 격상시키는 안전한 길은 교육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때문에 교육열이 높았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인지 남목초등학교의 전신인 ‘개운학교’의 설립자인 이규현 선생, 일제 때 판사를 지낸 이종남 판사, 교수, 군 장성, 방어진중학교의 설립자 이종산 선생도 모두 남목 출신들이다. 이곳 서부리에 있던 동면사무소를 1925년 12월에 방어진으로 이전하면서 동면의 행정중심은 방어진으로 옮겨간다. 당시에 남목 주민들의 반발이 없지는 않았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다 묻혀버리고 말았다.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다 잘 살았느냐고 물었더니 ‘이시모토 가츠에’씨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했다. 청운의 꿈을 품고 방어진으로 이주해온 사람들 중에는 술과 노름에 빠지거나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런 집의 아내는 남의 집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등 비참하게 생활하는 일본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고 했다.

또 일본 여자들은 태풍이 불거나 큰 파도가 친 뒷날에는 바닷가에 나가서 파도에 밀려나온 해조류들을 건져서 말리곤 했고, ‘뎅구사’라고 부르는 우뭇가사리는 주워서 묵을 만들어 먹었다고 했다. ‘가츠에’씨는 일본 사람들이 우뭇가사리로 만든 묵을 무척 좋아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우리의 어머니 조선의 아낙들도 큰 파도가 친 뒷날은 해안가로 나가 우뭇가사리나 천초와 같은 해조류를 주워 말려서 팔기도 했다는데, 아마도 그때의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츠에’씨는 ‘아시쿠차’를 따러 야산이나 등대산에 자주 갔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일본 아낙들은 초원 같은 곳에서 자라는 ‘아시쿠차’를 따서 잎과 줄기는 말린 후 차를 달여 마시고, 녹두처럼 생긴 열매는 절구에 갈아서 죽을 끓여서 먹었는데, 건강에도 좋았다고 했다. 지금도 등대산에 가면 많이 볼 수 있지만 한국 사람들은 이것을 먹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귀띔이었다. ‘아시쿠차’는 완두콩같이 생겼고 나무를 감아 오르는 덩굴성 콩과식물이라고 했다. 아마도 ‘새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장세동 울산동구문화원 지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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