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울산에 ‘서울의원’이 문을 열었다
제48화 울산에 ‘서울의원’이 문을 열었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9.16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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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려받은 땅 처분 결정하고 매수자 찾아 나서
은행부채 상환한뒤 남은 돈으로 의원 매입

소금장수가 되어 소금을 팔아봤자 소금처럼 짜서 공들인 것에 비하면 남는 것은 형편없었다. 마땅히 다른 돈벌이도 없었기에 나의 고민은 속으로 깊어갔다. 차고를 직접 관리하며 한푼 두푼 모아봤자 매월 이자 내기도 빠듯했다.

어린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해주고 나면 쌀독이 비어있기 일쑤였다. 하루하루를 빚쟁이에게 쫓기듯이 허둥지둥 하며 1년 6개월을 보내다가 한계에 도달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산더미 같은 부채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살던 집과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처분하기로 결정하고 매수자를 찾아 나섰다.

결국 정든 집을 남의 손에 넘기고 논밭까지 정리한 끝에 은행의 부채는 모두 상환했다. 아버지와 나, 동생들이 태어난 집을 남에게 비워주고 세간만 챙겨 나오려니 서러운 눈물이 쏟아졌다. 아내 역시 손때 묻은 집 안팎을 둘러보며 허전함을 감추지 못했다.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아내에게 돈을 벌면 더 좋은 집을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모든 부동산을 정리해서 은행의 부채를 상환하고 남은 돈으로 옥교동에 있던 작은 의원을 매입했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의원을 매입해서 시설과 인력을 재정비하고 ‘서울의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서울의원’이라고 한 이유는 내가 중학교부터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던 배경이 있고, 6·25 전쟁 중에 많은 사람들이 피난 내려온 서울 사람들을 ‘서울내기, 다마내기’하며 다른 느낌으로 선망하는 면이 있어서 서울의원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최신 시설을 갖춘 고급병원 인상을 줄 것 같아서였다. 성분도 병원의 경험을 살려 실력으로 정성을 다해 환자들을 보살피며 최선의 진료를 했다.

울산에 실력 있는 젊은 의사가 개업했다는 소문과 함께 서울의원은 단박에 유명한 의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번이라도 다녀간 환자들은 반드시 우리 병원을 다시 찾아주었고, 그들의 소개로 오는 환자들도 많았다. 울산에서 개업하고 있던 5∼6곳의 병원들 중에 일일 내원환자수가 가장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개업 당시부터 병원의 전반적인 업무를 직접 처리했고, 진료와 행정을 모두 관장하다 보니 하루가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몰랐다.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냈고, 환자의 수가 많은 날이면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그러나 내 병원에서 나의 고된 노동으로 벌어들인 돈을 보며 피로를 달래곤 했다.

인구 4∼5만 명의 작은 중·소도시 울산에서 가장 실력 있는 병원으로 이름을 떨치며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로운 병원 운영을 하던 어느 날, 난데없이 보건사회부로부터 의료동원 명령서가 날아왔다. 서울의원을 개업한지 2년 정도 지날 때였었는데 바로 5·16 군사혁명 직후였다.

군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독재자가 군림하며 의무관 복무를 하지 않은 전문 의료인들을 이유 불문하고 산간지방이나 낙도 등의 무의촌에 배치시켜 2년을 복무시키는 일종의 정치적 보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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