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청사의 명암
조선총독부 청사의 명암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2.03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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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도성이었던 서울에는 5 곳의 궁궐이 있었다. 이 궁궐들은 왕조의 흥망성쇠와 운명을 같이했다.

지금은 모두 궁궐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하지만 왕조가 권력을 상실한 일제강점기에 궁궐의 모습을 유지한 곳은 창덕궁과 덕수궁뿐이었다.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은 일제에 의해 무참히 허물어졌다. 일제는 허문 경복궁의 맨 앞자리에 그들의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었다. 창경궁은 동물원과 식물원이 들어선 공원으로 조성됐다. 명칭도 창경원으로 바뀌었다.

경희궁은 그곳에 일본인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세워지면서 헐려나갔다. 경희궁의 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는 사찰인 박문사(博文寺)의 문으로 쓰이기도 했다. 경성중학교 건물은 해방후에도 한 동안 서울고등학교 교사로 활용됐다.

한일합방 당시 덕수궁에는 고종, 창덕궁에는 순종이 살고 있었다. 두 임금은 각기 이태왕(李太王)과 이왕(李王)이라는 직함으로 일제강점기에도 그 궁궐에서 살았다. 그래서 덕수궁과 창덕궁은 궁궐의 면모를 지닌 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머지 궁궐들도 해방 이후에 곧바로 복원되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원형을 찾게 된 것은 창경궁이었다. 정부는 1980년대에 복원을 결정했다. 동물원과 벚나무는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일본식 건물들을 철거했다. 명칭도 창경궁으로 되돌렸다.

경복궁은 1990년대 조선총독부 청사를 허물어 버리면서 복원이 시작됐다. 정부는 2030년까지 전체 379동의 건물을 복원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더라도 원래 규모의 75.8% 수준에 머문다고 한다.

경희궁터는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현대건설에 매각됐다. 이 때까지만 해도 복원계획은 없었던 것이다.

이 터는 서울시가 매입하게 됐고 서울시는 2013년에야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을 문화재청에 제출했다. 복원사업은 2023년까지 추진된다.

일제는 서울에 조선총독부를 두었듯이 식민지였던 대만에도 대만총독부를 세웠다. 대만총독부청사는 현재 중화민국 총통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의 청와대와 같은 곳이다.

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에 건설했던 괴뢰국 만주의 수도는 창춘(長春)이었다. 일제는 그곳을 신경(新京)이라 고쳐 부르면서 황궁을 비롯한 정부청사들을 차례로 지었다.

만주국 황제, 푸이의 궁궐이었던 곳은 지금 위만황궁박물원(僞滿皇宮博物院)으로 활용되고 있다. ‘위만’은 만주국은 거짓 나라였다는 뜻으로 중국에서 부르는 용어이다. 당시 지어졌던 다른 건축물들도 여전히 활용되고 있다.

서울에서도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던 건축물들이 모두 허물어진 것은 아니다. 조선은행 건물은 지금도 한국은행 본점 건물로 쓰이고 있다. 경성역사 건물도 지금은 ‘문화역서울 284’라는 이름의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조선총독부 청사야말로 일제가 이 땅에 남긴 건축물 가운데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훌륭한 건축물이었다. 하지만 이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경복궁 앞자리에 상징적으로 세워졌던 이 건물은 식민문화 청산이라는 명제 앞에서 또다시 상징적으로 파괴됐다.

유적을 보존 또는 복원할 것인지와 허물어 버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시대 사회의 정신을 표출하는 것일 수 있다.

유구가 발견된 울산객사의 활용방안도 이 시대 울산사회의 정신을 나타내는 결정일 것이다. 시민의 총의를 모아 신중하게 결정할 일이다. 섣불리 결정할 일이 아닌 것이다.

<강귀일 취재2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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