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것보다야 ‘아하! 그렇구나!
모르는 것보다야 ‘아하! 그렇구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2.01 21: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상의 대화에서 무심코 쓰는 말인데도 그 뜻의 본질을 모르고 쓰게 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또 의미를 정확하게 안다고 우겨도 실상은 어렴풋이 혹은 그릇되게 알고 있는 탓에 비록 허물없는 친구사이라 하더라도 대화의 단절을 가져오는 경우를 이따금 겪게 된다. 특히 예외적이거나 불교적 해석이 필요한 때는 곤란한 경우가 더 자주 생긴다. 몰라도 세상 사는 데는 지장이 없겠지만 모르는 것보다 나은 ‘아하! 그렇구나!’의 세계로 떠나보자.

‘도로 아미타불’은 ‘나무아미타불’의 패러디(parody)이다. ‘도로 남’이라는 대중가요가 있다.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고 님이 되어 만난 사람도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다. 물고기에 ‘도루묵’이란 이름이 생긴 것도 비슷한 이유를 달고 있다. “목판 한 면 420자, 두 자만 삐끗해도 도로 아미타불”(2016.01.28.중앙일보). 헤드라인으로 쓰인 실례(實例)다.

‘화두(話頭)’는 선승이 궁구하는 다양한 방편 가운데 하나다. 현재는 ‘핵심’을 뜻하는 코어(core), ‘주요어’의 의미를 지닌 키워드(key word), 신문의 헤드라인(headline)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교수(敎授)’에서 교(敎)는 성인의 말을 널리 전하는 것을 뜻하고 수(授)는 자신을 훈계하여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宣傳聖言 名之爲敎 訓誨於我 名之爲授). 대학에서 강의하는 사람을 교수라 부르는 이유는 지식을 그들이 전하고 그들을 통해 배우기 때문이다.

‘기관(機關)’은 괴뢰(傀儡) 즉,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체가 지·수·화·풍의 사대로 결합된 것을 기관목인(機關木人)이라고 한다. 선가(禪家)에서는 종사(宗師)가 학인을 제접하여 지도하는 교묘한 수단의 작법을 의미한다.

‘공덕(功德)’이란 말에서는 베푸는 것을 공(功)이라 하고,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을 덕(德)이라 한다. ‘깊은 물에 다리 놓아 월천공덕(越川功德) 하였는가?’, ‘배고픈 이 밥을 주어 아사공덕(餓死功德) 하였는가?’ 등의 사례에서 짐작하듯 공덕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오호(嗚呼)’는 문장에서 탄식함을 나타낼 때 흔히 쓰인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오호애재(嗚呼哀哉)라! 까마귀가 이상한 것을 보면 경계하여 소리를 내는 데서 착안했다. 본래 ‘오(烏)’에서 입 구(口)자를 보탠 ‘오(嗚)’는 사족으로 틀린 것이다.

‘환중(?中)’이라는 말이 있다.『조선환여승람(朝鮮?輿勝覽)』에서 쓰이는 ‘환여(?輿)’와 유사한 의미로 쓰인다. 환중은 무슨 의미일까? 인간세상이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여박환중(旅泊?中)’이란 표현이 있다. 나그네가 여관에 잠시 머무르고 배가 하룻밤 닻을 내리는 그러한 인생사를 말하는 것이다.

‘갈대’는 기수역(汽水域) 혹은 강변에서 자라는 대나무를 가리킨다. ‘갈’은 갈-까마귀 등에서 보듯이 ‘작다’는 의미도 있지만 ‘강(江)’과도 통한다. 갈대는 강에 있는 대나무라는 뜻의 강죽(江竹)이다. ‘갈’은 바다와도 통한다. 갈매기는 바다에 살기 때문이다.

‘걸식(乞食)’은 일반적으로 ‘구걸해서 먹는다’는 의미로 쓰인다. 실상은 베풀어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시식(施食)’의 의미가 와전된 것이다. 걸식은 범어 ‘Pinda-Pata’의 음역(音譯)이다. ‘Pinda’는 쌀 따위로 만든 경단 모양을 가리킨다. ‘Pata’는 떨어진다는 의미이다. 현재 인도 등지에서 아침이면 쉽게 볼 수 있는 수행승의 공양 모습이다. 길가에서 신도들이 수행승을 기다렸다가 다가오면 승려가 들고 있는 바루에 시식물을 넣어준다. 인도 불자들의 수행승을 위한 공양 행위가 중국에서 걸식(乞食)으로 표현되면서 구걸의 의미가 강하게 부각된 것이다. 물론 ‘거지동냥’이라 할 때 달라고 하는 ‘동냥’과 스스로 베풀어주는 ‘시식(施食)’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봉덕각시’는 보기 좋게 통통한 갓 시집온 색시를 일컫는 덕담이다. 활용된 예문 ‘아이고, 새색시가 봉덕각시 같으네!’의 ‘같으네!’에서 봉덕각시는 비유의 대상임을 직감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부처의 화현성이 일반적이다. 보덕보살은 아가씨 혹은 색시로 화현(化現)해서 수행자의 수행을 시험하는 설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오동통하며 후덕한 보덕(普德)보살의 와전이다. 사찰 이름에 ‘보덕사’(普德寺)가 많은 것도 보덕관음 사상을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동진(童眞)은 어릴 때 출가한 이를 부르는 말이다. 일찍 머리를 깎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올깎이’라고도 한다. 반대로 ‘늦깎이’는 나이가 들어서 출가한 수행자를 말한다. 7살부터 15살까지를 ‘동(童)’이라 부른다. 이유인즉 동정을 아직 잃지 않아 색(色)에 물들지 않은 까닭이다. 사족을 달면 ‘되깎이’는 사정이 있어 환속했다가 다시 산문에 들어온 승려를 절 집안에서 가리키는 말이다. 더 깊은 의미는 화엄경에 등장하는 ‘선재(善財)동자’처럼 ‘동진위(童眞位)’를 말하는 것이지 생리적으로 어린 아동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조류생태학박사>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