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의사가 되어 환자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제47화 의사가 되어 환자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9.11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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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는 환자들은 단기간에 배로 늘어
울산을 오가며 2년동안 일하자 폐결핵 재발

‘드디어 본업을 찾았다. 성심, 성의껏 환자를 진료했다. 최선을 다하는 진료는 금방 환자들 사이에 소문으로 퍼졌고 그 덕분에 나를 찾는 환자들은 꾸준히 증가했다. 처음 진료를 시작할 때는 하루에 100여명 정도였던 환자수가 단기간에 배로 늘어 동료 의사들과 병원 운영진이 깜짝 놀랐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고 찾아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수많은 환자를 돌보다가 식사를 거르기 일쑤였고, 동료들이 퇴근할 때에도 환자를 봐야 할 만큼 내 몸은 혹사당했다. 심지어 휴식을 취할 때조차 귀에서 이명이 들리기도 했다.

하루가 어찌나 짧은지 정신없이 진료를 하다가 창밖을 보면 주변이 어두워져 있었고, 퇴근 시간이 지난 지 한참일 때가 많았다. 비록 몸은 고단하고 힘들었지만 나를 찾아주는 환자들이 있기에 행복했다.

하루가 어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정신없는 시절이었으나, 휴일마다 울산으로 향했다.

나를 반기는 가족의 얼굴을 보며 일주일동안 쌓였던 피로를 풀었고 창고 운영도 챙겼다.

다행이 창고 운영은 순조로웠고 가족들의 밝은 표정과 아이의 싱그러운 웃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지친 몸에서 새로운 기운이 솟아났다.

주말마다 울산을 오가며 가족들의 얼굴을 보며 힘을 얻고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다가 꿀맛 같은 휴일이 지나면 새벽길을 달려 병원으로 출근하기를 2년 동안 하자 몸에 무리가 왔는지 잊고 있던 폐결핵이 재발했다. 맡은 직책에 정신없이 매진한 결과로 엉뚱하게 내 몸을 공격하는 병을 키운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병원 근무를 할 수 없었기에 제1소아과장직을 사퇴하고 울산으로 돌아와 폐결핵에 좋은 약들을 구해서 안정을 취하며 치료에 힘썼다. 집에 올라와 요양을 하는 와중에도 소금을 거래하던 전매청에 소매업 허가를 신청하여 도매만 하던 소금을 소매로 팔기시작하자 쏠쏠한 돈벌이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소금이 곡식 다음으로 귀한 대접을 받는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서해안은 간만의 차이가 심하고, 갯벌이 바다 멀리까지 펼쳐져 있어 천연의 염전(鹽田)을 만들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소금을 동해안 울산에서 파는 것은 진정 전매업(專賣業)에 속하는 것이었다. 자동차 길이 없는 산골 마을에는 소금장수가 소금을 지게에 지고 다니며 팔러 다니던 시절이었다.

‘창고 운영과 소금 도·소매업으로 재미를 본 나는 창고 옆에서 오랫동안 방치되어온 정미소를 가동시키며 돈벌이에 나섰다. 성분도 병원에 재직할 때에는 매월 상당한 금액의 봉급을 꼬박꼬박 집으로 보냈으나 요양을 위해 일을 그만두자 당장 살림살이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창고는 순조롭게 돌아가고 정미소까지 가동했지만 나의 실직으로 가계수입은 반 토막이 났고 설상가상으로 몸까지 아파서 매월 지출되는 생활비는 훨씬 더 불어났다. 먹고 사는 문제는 웬만큼 해결이 되었으나 은행의 빚은 이자를 감당하기도 벅찼다. 동생들의 학비와 식솔들의 끼니 걱정에 밤잠을 설친 날이 많았고, 어려운 살림살이로 마음고생을 하는 아내의 얼굴 보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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