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비영리단체 만드는 게 새해 꿈이죠”
“국악 비영리단체 만드는 게 새해 꿈이죠”
  • 김정주 기자
  • 승인 2016.01.19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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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숙 척산국악원 원장·영남판소리보존회 울산지회장
 

울산 중구 우정동 당산길에서 국악학원을 열고 있는 여명숙 (사)영남판소리보존회 울산지회장(58)에겐 주말이 따로 없다. 바삐 움직여야 하는 것은 타고난 숙명인지도 모른다.

지난 18일 중구 우정시장 안 허름한 건물 2층 ‘척산국악원’의 문을 조심스레 두들겼다. 월요일 오전이어서인지 수강생이 대여섯밖에 보이지 않는다. 현재 18명이 등록한 상태라지만 40∼50대 가정주부 외에 직장인도 더러 섞여 있어 100% 출석은 대외행사 때나 가능한 일이다. 19일에 그 일을 ‘위안잔치’란 이름으로 해냈다. 우정경로당에서 소일하는 어르신들에게 떡국도 대접해 드릴 겸 시간 나는 제자들을 몽땅 불러 모은 것이다. 또 매월 마지막 목요일에는 중구 성안동에 있는 시립요양원에서 재능기부도 해 드린다. 벌써 10년째다.

박동진 명창도 감탄한 ‘타고난 목소리’

“사랑도 하여나 보고 실망 실연도 당했노라/ 오동추야 기나긴 밤에 기다리기도 하였단다/ 아프고 쓰린 가슴을 쥐고 울기도 하였단다// 사랑도 거짓말이요 임이 날 위함도 또 거짓말/ 꿈에 와서 보인다 하나 그도 역시 못 믿겠구려/ 날 같이 잠 못 이루면 꿈인들 어이 꿀 수 있나//”

대표적 경기민요의 하나인 ‘노랫가락’ 소리가 추위로 썰렁해진 학원 내부를 서서히 녹여갔다. “‘사랑도 거짓말’이란 말도 있지요? 사연이 있으면 노래도 그만큼 애절함이 있어야지. 꿈에 와서 보인다는 것도 역시 거짓말… 하는 대목에선 분위기가 좀 살아야 해요.” 민요에 대한 감정이입(感情移入)을 주문하는 스승의 당부다.

여 원장이 척산국악원에 들르는 요일은 월, 목, 금요일 등 사흘뿐이다. 화요일은 성안동 주민센터에서, 수요일은 남구문화원과 중구종합사회복지관에서, 그리고 목요일 오후에는 중구 문화의 전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친다.

“육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 “ ‘못 간다고 전해라’를 크게 유행시킨 그 유명한 노래 ‘100세 인생’도 장구 반주에 맞춰 중간에 끼어들었다. 교육효과를 생각해서 선창한 소리이지만, 어차피 우리 민족은 ‘흥’의 민족이 아니던가.

그러는 사이 의문부호가 하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 자그맣고 아담한 체구 어디에서 저렇게 비범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터져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여러 모로 미루어, 청아하면서도 힘찬 그녀의 목소리는 타고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본인도 굳이 부인하지는 않았다. “돌아가신 박동진 선생님께서 저더러 ‘저년을 누가 낳았을꼬? 경기돈지 전라돈지 구분이 안 된단 말이여’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답니다.”

우리 소리 강의가 계속됐다. “이건 비나리 공연을 위해 만든 소리예요. 보글보글 냄비 끓어오르듯이 소리를 끌어올려야 합니다.”

올해 정월대보름, 중구 백양사 앞 빈터에서 치를 예정인 달집태우기 행사에는 강강수월래와 창부타령, 노랫가락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래서 연습에 열심이다. 지난해 중구 문화의 전당 앞에서 열린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행사 때는 불티가 날리는 바람에 수십만원 하는 옷가지를 소지처럼 태워 없앤 일도 있었다.

 

 

10년 넘게 베푼 선행으로 ‘유명인사’ 반열에

여명숙 원장은 새해 들어 갑자기 울산 바닥의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그녀가 지역사회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10년 넘게 이어진 그녀의 숨은 선행에 있었다. 중구청이 보도자료까지 만들어 남몰래 쌓아온 그녀의 적선(積善)에 대한 속사정은 대강이 이렇다.

2005년 겨울, 여명숙 원장은 중구 성남동의 ‘아구센터’ 앞을 지나가다 길가에 쓰러진 최 모씨(당시 55세)를 우연히 발견했다. 평소에도 측은지심이 강했던 그녀로서는 사경을 헤매는 중환자를 못 본 척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우선 급한 대로 최씨를 가까운 성남병원(현 인산병원)으로 옮기고 치료비까지 선뜻 대납해 주었다. “그분은 천식이 어찌나 심했던지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어요. 차림새는 초라했고 몸은 너무 야위어 있었고… 끼니를 오래 굶다보니 힘이 부쳐서 쓰러지신 것 같았어요. 병원을 찾다가 그랬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땐 60대 할아버지인 줄로만 알았고요…”

신약성경(누가복음 10장)에는 강도를 만나 길가에 쓰러진 유태인을 도와서 살린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나온다. 여 원장은 독실한 불자이지만 ‘착한 사마리아인’에 비유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여 원장의 생각에 최씨는 의지할 친척 하나 없이 홀로 살아가는 것 같았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녀는 지체 없이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0만원 하는 셋방도 한 칸 마련해 주었다. 그 뒤로 조금씩 도와준 것이 어느덧 햇수로 10년이 넘었다. 그녀는 필요할 때마다 식재료며 먹을거리, 이불, 생필품에다 전기세까지 일일이 챙겨주면서 최씨를 살뜰하게 보살폈다. 한쪽 눈의 백내장 수술비도 마다않고 지원했다.

“돌아보면 저 혼자만 도운 게 아니었죠.” 여 원장은 공을 애써 다른 분들에게 돌린다. “저한테서 배운 제자들의 도움이 있었고, 특히 중구 병영의 무심사 주지 보명(普明)스님의 도움이 대단했죠.”

그러던 차에 지난해 말에는 최씨의 상태가 더욱 심상찮아졌다. 해묵은 지병(천식)이 악화되면서 발작 증세까지 나타나 한 달에 대여섯 번은 병원 응급실 신세를 져야 했고, 다른 한쪽 눈에마저 백내장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여 원장이 나중에 안 일이지만, 최씨에게는 연락 끊긴 지 오래지만 그의 자식이 주민등록에 남아있었고, 이 사실은 기초생활수급자 등록의 길을 가로막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여명숙 원장의 선행이 매스컴을 타게 된 것은 순전히 중구종합사회복지관장의 제보 덕분이었다. 복지관장은 일주일에 한 번 소리를 강의하러 찾아주는 여 원장과의 대화에서 그동안의 사정을 속속들이 귀담아듣고 나서는 최씨의 눈 수술까지 도맡아 주기도 했다. 도울 방법을 찾던 중구청 희망복지지원단은 ‘위기가정 지원 사업’에 눈길을 돌려 최씨에게 생계비 30만원을 우선 지원한 데 이어 관내 봉사단체에도 알려 집수리도 말끔히 시켜주었다.

이제 남은 일은 최씨에게 ‘맞춤형 급여’ 수급자로 등록시켜 주는 일, 그리고 천식 치료 전문병원을 알선해 주는 일이다. 여 원장은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중구청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복지경제국장도 여러 번 만나 의견을 나누었다.

“다음 달부턴 더 이상 안 도와드려도 될 것 같아요. 그분이 제도권의 품안으로 들어가시게 되었으니까요.” 천식 치료 전문병원 문제도 곧 해결될 것 같다는 밝은 소식도 곁들인다.

여섯 살 때 시조창… 장월중선·안비취 선생에 사사

 

 

여명숙 원장은 ‘58년 개띠’다. 그리고 울주군 언양읍 반천리 미연마을이 태어난 고향이다. 그러나 어려서 경주로 이사했다. 경찰공무원인 부친을 따라 일가족이 주소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락과의 첫 만남을 그녀는 여섯 살 때로 기억한다. 이때 처음으로 접한 것이 시조창이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란 말 그대로 집 가까이에 있던 동도국악원을 놀이터로 삼다보니 자연스레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경주시립국악원이 1967년에 문을 열면서부터는 본격적인 소리꾼의 길로 들어선다. 동도국악원을 설립하고 경주시립국악원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후진 양성에 여념이 없던 장월중선(張月中仙, 1925-1998, 판소리 명창, 가야금병창 보유자) 선생님을 하늘같은 스승으로 모셨다. 이 선생님한테서 남도민요, 판소리 할 것 없이 온갖 것을 거의 다 배웠고, 안비취(安翡翠, 1926-1997,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경기 명창) 선생님한테서는 4년 남짓 경기민요를 사사받았다.

여 원장에게는 몇 해 전에 타계한 울산의 춤꾼 이 척 선생에 대한 추억도 지워지지 않고 살아있다. “그분은 원래 전공이 발레였거든요. 장월중선 선생님에게 우리 춤(한량무, 살풀이)을 배우겠다고 경주시립국악원을 자주 찾아오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또 그녀는 자신이 ‘득음(得音)’을 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산(山)공부’를 안 하는것도 아니다. 겨울철에는 한 달, 여름철에는 보름에서 스무 날 정도 지리산 칠성계곡을 찾아 여럿이 같이 공부하거나 혼자서 ‘독(獨)공부’를 한다.

판소리로 ‘대통령상’ 받아보는 게 또 다른 꿈

여명숙 원장은 그동안 상도 많이 탔지만 판소리로 대통령상 한 번 받아보는 게 새해 꿈이다. 판소리 하나만큼은 자신감이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중구청이 울산제일일보와 손잡고 해마다 마련하는 ‘금요문화마당’에서 몇 차례 그 실력을 뽐낸 바 있다.

상복은 33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1983년도 ‘KBS 전국노래자랑 연말결선’(제1회)에 울산 대표로 나가 창부타령과 시조창으로 우수상을 받았던 것이다. 작고한 위키리씨 사회로 진행된 연말결선에는 심사위원으로 작곡가 김광섭 선생과 함께 안비취 선생님도 자리를 같이하셨다. “그때만 해도 국악인에게 1등상 주는 일은 없었죠.” 그래서 여태 한(?)이 남아있고, 그래서 대통령상에 대한 집념이 불타오르는지도 모른다.

대통령상을 거머쥐자면 전주 대사습놀이 전국대회이나 남원 춘향제, 보성 소리축제에 나가야 한다. 그녀는 그럴 참이다. 지금까지는 2012년 대구에서 열린 달구벌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경기민요 ‘노랫가락’과 ‘창부타령’, 그리고 ‘12잡가(경기잡가의 하나)’를 불러 종합대상인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차지한 것이 최고의 상인 것으로 기억된다.

여 원장에게는 고인이 되신 아산 정주영 회장에 대한 추억도 남아있다. 그녀는 정 회장의 고희연이 현대중공업 영빈관에서 열렸을 때 정식으로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안비취 선생님과 ‘배뱅이굿’으로 이름을 떨친 이은관 선생님도 가까이서 대면할 수 있는 영예의 자리이기도 했다.

새해에는 반드시 이루고 싶은 또 하나의 꿈이 있다. 국악과 관련된 비영리단체를 만드는 일이다. “소외계층에 질 높은 국악을 보여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19일에도 그녀는 중구청 문턱을 밟았다. 비영리법인 설립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글·사진=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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