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동(靜中動)과 살풀이춤
정중동(靜中動)과 살풀이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1.18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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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춤의 멋을 말할 때 흔히 ‘정중동(靜中動)’이라고 표현한다. 특히 살풀이춤을 평할 때 더욱 그렇다. 정중동이 무슨 의미인가? 사전적 의미는 ‘조용한 가운데 어떤 움직임이 있다’이다. 나이가 들수록 호기심이 많아져서일까, 살풀이에 대한 평론을 모아 보았다.

“발 디딤새는 정자(丁字)로 사뿐하면서도 지긋이 지려밟는 맛이 있고, 팔 놀림새는 잔재주 부리지 않고 정중하고 부드럽다. 그런 모든 움직임을 한데 모아 들어 올려서 깨끗이 매듭지어 주는 손사위가 정갈하다”-강창범(姜昌範.1929년생)/ “지휘봉 끝으로 미세한 음과 박자를 끌어내듯 손끝 어딘가에서 슬쩍 비치는 어깨놀림에서 굽힌 듯 만 듯한 무릎의 굴신에서 그는 장단을 끌어내고 장단을 받아낸다. 우리 춤의 멋 중에서 정중동(靜中動)의 완성을 보는 것 같은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공대일(孔大一.1910년생)/ “그의 춤은 크다. 그의 춤이 커다란 크기, 무게 있는 부피를 지니고 관객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은 그 너름새에서 나온 힘이며, 장단 속의 터득에서 나온 요령이 있기 때문이다”-김소희(金素姬.1917년생)/ “호남 내륙의 몇몇 명무(名舞)들의 춤에서 보이던 정중동(靜中動)의 맛, 장엄하면서도 고아(古雅)한 품격이…”-장금도(張今道.1928년생)

앞에 소개한 것은 강창범, 공대일, 김소희, 장금도 제씨의 살풀이를 접하고 문화예술평론가 구희서가 쓴 글에서 가려낸 것들이다. ‘정중동’은 예문에서처럼 상황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미묘한 뜻의 표현이다. 하지만 다른 춤에서는 잘 안 보이는 정중동이란 표현이 유독 살풀이춤에서는 자주 나타나고 있으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노릇이다.

정중동은 추워서 꽁꽁 언 겨울 논밭 속에서도 봄의 기운이 꿈틀거린다는 말로도 비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표현이 어떤 의미로 살풀이에 사용되었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어떤 무용평론가가 살풀이에 감정이입(感情移入)되어 표현한 뒤부터 답습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 역시 제자들이 물을 때마다 한자의 의미를 풀이해 주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고 이매방(李梅芳.1927∼2015) 선생은 한 전문지 인터뷰에서 “전통춤은 한복의 선처럼 곡선의 아름다움이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중동(靜中動)에 있다. 몸에서 배꼽이 ‘중’이고 밑은 ‘정’, 위는 ‘동’이다. 이는 이 세상의 음양의 이치를 포함한 것으로 이 이치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한다”(머니투데이.2015.5.15.)라고 했다. 우봉 선생은 ‘조용한 가운데 어떤 움직임이 있다’는 개념을 넘어 현상적으로 정중동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갈매나무’에서 중요한 것은 나무가 아니라 ‘짙은 초록색’을 뜻하는 ‘갈매’이듯이, 살풀이에서 중요한 것은 미학적 표현 ‘정중동’이 아니라 정서적 본질인 ‘살푸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용은 움직임이 중심이고, 다라서 ‘정중동(靜中動)’이 아니라 ‘동중정(動中靜)’이기 때문이다.

“그의 살풀이는 긴 장단에 긴 수건을 들고 수건춤을 추다가 허리를 질끈 동여매고 잦은 가락으로 넘어가 소고를 들고 노는 순서가 한판으로 짜여진 아담한 소품(小品)이다. 아뢰는 자세로 다소곳한 정(靜) 속에 가볍고 재치 있는 어리광 같은 동(動)이 있다.” 이 글은 김계화(金桂花.1925년생) 선생의 살풀이춤을 보고 구희서가 쓴 글이다. 김계화의 살풀이는 소고로 마무리한다는 점에서 수건만 고집하는 여타의 살풀이춤과는 다르다. 살풀이는 긴 수건만 지물(持物)한다는 고정관념마저 떨쳐버리게 하는 것이 그녀의 살풀이다. 김계화 선생은 동래 출신으로 마산을 거쳐 울산에서도 잠시 활동했다.

정중동(靜中動)은 불교 수행인도 사용하는 선원(禪院)의 용어로 좌선(坐禪) 혹은 안선(安禪)의 의미를 지닌다. 안선은 움직이는 것을 안정시키는 작법이다. 좌선은 그 자세가 정(靜)이며 일체의 동작을 삼가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작법이다. 안선은 독용(毒龍)을 제도한다는 말(安禪制毒龍)에서 그 목적을 읽을 수 있다. 반면 동(動)은 ‘이 뭐꼬?’란 화두에 비유할 수 있다.

무용의 정중동과 안선의 정중동을 비교해 보면, 살풀이의 정중동은 움직이고 멈추고 다시 움직이는 듯 멈추는 듯 되풀이되는 춤동작의 형용임을 알 수 있다. 반면 안선의 정중동은 외면보다 내면을 더 강조함을 알 수 있다. 결국 무용은 움직임이 중심이고, 안선은 움직임을 쉬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용은 정중동이 아닌 동중정(動中靜)으로 이해해야 한다. 무용은 근간은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무용에서 이론과 실기, 전통과 창작은 새의 양 날개처럼 중요한 두 축을 이룬다. 마치 비익조와도 같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는 지나치게 실기와 전통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았다.

무용인은 춤을 정중동으로 추지 않는다. 굿거리, 자진모리, 휘모리 등의 장단에 맞춰서 춘다. 하지만 무용평론가는 정중동이라고 본다. 건강한 무용의 지속적인 발전을 원한다면 시의적 접근이 필요하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해결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끊어짐 없이 실천하는 일에는 무용인이 앞장서야 한다. 춤에 대한 이론은 설득력을 지닐 때라야 비로소 표현과 더불어 동반 상승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조류생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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