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성 ‘복원 정비’ 유감(有感)
병영성 ‘복원 정비’ 유감(有感)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9.10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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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복원, 정비’가 거론되고 있는 병영성도 울산의 지리적 위치로 인한 잦은 왜구 침입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 특히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까지 역대 왕(王)들을 괴롭혔던 골칫거리 중 하나가 대마도에 근거를 둔 왜구의 남동해안 지역 출몰, 약탈이었다. 대마도와 근거리에 있는 울산, 부산, 동래 해안지역은 왜구의 노략질로 인해 민가가 거의 없을 정도로 피폐했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조 태조4년(1396년), 지금의 울산 북구 강동동 구유리 지방에 왜구가 침입해 군사 3명을 살해했다. 또 태조 5년 11월17일 울산군 지주사(지금의 군수) 이은이 침입한 왜구 6명을 베어 그 공로로 비단을 하사 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앙심을 품은 왜구들은 이듬해 1월3일 재차 쳐들어와 지주사 이은을 대마도로 납치해 가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려 우왕때 쌓은 울산읍성, 조선조 태종 17년에 건립한 병영성, 연산군 6년에 울주군 언양읍 일원에 개축한 언양읍성 모두가 창궐하는 왜구에 대비해 축성한 것들이다. 울산읍성은 임진왜란때 왜군들이 헐어 지금의 학성을 쌓는데 사용하는 바람에 그 원래 위치와 규모는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중에서 지금의 울산광역시 중구 동동, 남외동, 서부동 일원에 남아있는 병성성을 복원, 정비해 문화재 가치를 되찾자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번 운동의 의의를 단순한 ‘돌성 쌓기’ 재현쯤으로 인식해서 안 될 이유가 몇 가지 보인다. 병영(兵營)과 함께한 민초(民草)들의 애환이 새로 조명되고 있다는 점이 그 하나다.

조선 초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영남해안 방어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태종17년(1417년) 울산, 창원에 경상좌우병영을 뒀다. 특히 울산에는 수영(水營), 즉 수군(水軍)지역사령부와 병영(兵營), 육군지역사령부가 함께 있었다. 육군과 해군을 연계시켜 적전의 효율성을 꾀했던 것 같다.

임진왜란 후에는 수영을 부산 동래로 옮겼지만 경상좌병영, 즉 지금의 병영은 1895년 폐영될 때 까지 울산에 남아 지역민과 운명을 같이 해왔다. 그런데 이런 관아가 있음으로 해서 생겼던 백성들의 고난과 그것이 후세들에게 남긴 영향력은 그동안 조명되지 못했다. 조선후기 1862년 당시 울산군 13개 면(面)중에서 8개면은 좌병영에, 5개면은 울산부(府)에 세금을 냈다. 당시 궁핍한 국가재정을 충당하던 환곡이 문제가 돼 민란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경상좌병영이 환곡 추가부과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 이전에 다른 8개면 농민들이 부담하던 세금을 한마디 상의도 없이 울산부(府) 관할 5개면 농민들에게 부당하게 부과하자 이에 항의해 봉기한 사건이 있었다. 난(亂)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4명이 희생되고 주동자 5명은 처형당했다. 이는 좌병영의 횡포에 저항한 농민들의 반봉건 투쟁으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좌병영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난 후에도 그 쪽 사람들의 기질은 여전히 억세고 강인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울산지역의 시위운동은 언양, 병영, 남창 세 군데서 일어났지만 희생자가 난 곳은 병영뿐이었다. 정작 울산읍 중심부분에선 움직임이 없었던 반면에 변두리 지역인 병영에서 만세운동이 먼저 일어났고 4명의 희생자가 생긴 것은 ‘병영 농민정신’과 무관치 않다. 울산 시의회 ‘풀뿌리 의정포럼’이 병영정신의 모태를 ‘복원, 정비 하자’고 나섰다. 의미 있는 일이다.

병영에서 비롯된 역사적 사건들은 단순히 그 지역의 ‘과거’로 끝나는 게 아니다. 병영성이 축성될 때부터 울산군 사람들은 그 성곽과 운명을 같이 할 ‘미래’까지 안고 있었다. 조선시대 지방 병영 중에서 울산 좌병영과 똑같이 1417년에 설치돼 1895년에 폐영된 전남 강진군의 전라병영은 현재 복원돼 80% 완공된 상태다.

일개 군(郡)이 1997년부터 국비를 포함해 총 340억 원을 투입해 사업 중에 있다. 울산광역시도 이미 마련돼 있는 ‘병영성 종합정비계획’을 서둘러 실천에 옮길 일이다. 불의에 맞서 싸웠던 조상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서둘러야 한다.

/ 정종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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