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와 무명(無明)
새해와 무명(無明)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1.0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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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중학교 시절 이야기다. 당시 중학 2학년 학생만 해도 족히 700명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필자의 반에는 매달 시행하는 월말고사에 늘 전교 1등하는 학생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머리가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친구들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항상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 때는 종이 한 장을 보아도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 흔한 말로 길가 포장마차에서 찐빵을 싸주는 종이라 하여 ‘찐빵종이’라고 하는 것도 있었다. 재 색깔에 물기만 조금 묻어도 쉽게 찢어져버리는 종이다.

공부 잘 하는 그는, 항상 이런 찐빵종이에다 펜대로 잉크를 찍어 하나하나 필기해가면서 공부하는 부지런한 친구다. 놀라운 것은 월말고사를 치기 3일 전에는 반드시 전 과목을 요약 정리해 두는 좋은 습관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과목마다 한 장씩 찐빵종이에 펜으로 일일이 요약 기록하는 남다른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다. 그 후 시험 전날에는 여유 있게 찐빵종이의 요약내용만 열중하는 요령 만점의 ‘영특한’ 친구다. 그래서 늘 1등 자리를 차지한 것 같다.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들자. 어느 시골에 건장한 젊은이가 있었다. 한가한 날 대청마루에서 낮잠을 곤히 자고 있는데 난데없이 파리가 입속에 들어가 버렸다. 너무나 걱정이 되어 동네병원에 가 자초지종 물어보았다. “이봐. 젊은이! 자네 바보 아닌가? 어떻게 파리가 뱃속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고 의사는 되레 꾸중을 하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잠자코 생각을 해보니 분명히 그 의사는 실력 없는 엉터리의사라 생각했다. 답답하여 다른 동네에 있는 의사에게까지 찾아가 상담해 보았는데 똑같은 꾸중만 듣게 되었다. 역시 그 의사도 실력 없는 엉터리 의사라 단정지었다.

모든 일은 삼세판이니 다시 한 번 다른 의사를 찾아가 물어보기로 했다.

이번의 의사는 이게 웬일인가! 혼쭐내기는커녕 크게 환영을 하면서 이런 치료는 누워서 떡 먹기라 한다. 한술 더 떠 이 분야는 본인이 의과대학에서 줄곧 전공한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침대에 누워 잠시 입을 벌리고 있는 사이 의사는 조용히 옆방에 가 파리를 잡아 왔다. “자. 젊은이! 이것 보라고! 감쪽같이 파리를 꺼냈지 않았나?”….

그제야 젊은이는 안도의 한숨을 쉰 것이다. 그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불가에서 가장 경계하는 말은 ‘무명’(無明)이다. 그것은 12인연(因 )의 하나로 그릇된 의견이나 고집 때문에 모든 법의 진리에 어둡다는 말이다. 명(明)은 밝음, 곧 지혜를 뜻하므로 ‘무명’은 지혜가 없다는 ‘어리석음’을 말한다.

어리석음은 탐진치(貪瞋癡)에서의 ‘치’다. 탐진치는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로 탐심·진심·치심일진대 무명은 즉 치심(癡心)인 것이다.

1939년에 발표한 춘원 이광수의 단편소설 ‘無明’이 있다. 기독교 사상이 바탕인 계몽문학으로 일관해 온 작가가, 불교적 인식으로 전환을 시도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작가 자신이 소설다운 소설임을 자부했듯이 부정적 인물들의 군상이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윤·민·정’ 세 사람의 성격적 결함과 탐욕·분노로 빚어지는 암투, 시기·아첨·자기과시·거짓말 등에 의한 사건전개가 작품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그들의 탐욕과 분노는 바로 그들의 ‘무지(無知)’의 소산인데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배경이다.

새해는 바라건대 모두가 어리석은 일, 즉 ‘무명’의 일은 행하지 않고 지혜로움을 발휘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김원호 울산대 국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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