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한 그릇과 신 김치
라면 한 그릇과 신 김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12.07 22: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탄 캐럴이 은은히 들리는 초겨울이다. 강의가 없는 날이라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식탁 위 소쿠리에 어제 삶아 놓은 고구마 중 큰 것 하나 골라 륙색에 넣었다.

며칠 전부터 어쩐지 오른쪽 팔이 잘 올라가지 않아 동네 한의원에서 침을 맞았다. 그런데 잘못 맞았는지 더욱 올릴 수 없다. 통증도 좀 있어 오십견인 듯하다. 아니 지금 내 연령의 병과는 좀 거리가 있어 그것은 분명 아닐 것 같다.

그래서 예전에 자주 몸을 추슬렀던 숯가마 찜질방에 가기로 했다. 걷기를 좋아 하니 그곳까지 한번 걸어가는 것도 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집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어 일단 버스를 타고 국도로 나간 다음 시골 동네입구에서부터 걸어가면 된다. 갈증에 대비하여 마트에서 싱싱한 방울토마토 한 바구니도 사서 륙색에 넣었다.

그런데 웬걸 막상 걸어보니 시골 도로가 생각보다 상당히 위험천만한 것이다. 인도라고 해봐야 겨우 도로의 좌우 10센티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답답한 짓을 한 건가? 도로 변에는 논이며 배 밭, 감나무 밭이 즐비한 천혜의 아늑한 시골인데 말이다. 농사를 짓고 있는 이곳 농부들은 어떻게 일터로 다니라는 건지 난감하다.

게다가 도로는 레미콘 트럭들이 분잡하게 왕래한다. 그것이야 잘못된 일이 아니지만 트럭끼리 경쟁하듯 질주하는 것은 분명히 큰 문제다. 그러니까 보행자로서는 마치 올빼미처럼 앞뒤를 두리번거리면서 걸어야만 한다.

모처럼 찜질방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모험의 길이 될 줄 몰랐다. 집에서 출발하여 1시간 반이 좀 지나 도착하였으나 반갑지 않은 듯 입구에서는 개가 짖어댄다. 첫 예감부터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다. 숯가마장에는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그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주인이 바뀌었는지 카운터에는 할아버지가 맥없이 지키고 있다.

요즈음 영업이 잘 되지 않아 불을 지핀 숯가마는 저기 초고온 한 군데뿐이라 한다. 손님께서 숯가마의 열기가 마음에 드시면 이용하시라는 솔직한 말을 한다.

정오가 되니 배꼽시계가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구내의 식사메뉴라고는 라면밖에 없다. 3천원짜리 라면에 반찬은 김치뿐인데 김치 맛이 가관이다. 너무 오래됐는지 어찌됐는지 모르지만 거의 ‘식초’와 다를 바 없다. 하기야 요즈음 건강 방송프로에 자주 등장하는 식초의 효능을 생각하면 건강을 위하여 먹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마침 집에서 가져온 큰 고구마 하나와, 아까 마트에서 구입한 방울토마토와 같이 먹으니 기가 막히게 궁합이 맞는다.

게다가 오늘 점심에 먹은 라면 한 그릇과 신 김치는, 염분 덩어리에 식초를 먹은 것과 다름이 없는지라 최고의 균형 잡힌 건강식단이 된 것이다.

‘찜질방’이란 자고로 땀을 많이 배출하는 노폐물 처리장 같은 곳이다. 냉큼 초고온 숯가마에 10분간 들어갔다 나오니 온 몸의 땀은 비 오듯 한다. 그리고 시원한 산속 바깥공기를 쐬고 있으면 그야말로 날치처럼 하늘을 날 것 같다. 정신은 최고조로 맑아 있고 뇌에서는 섬광이 번쩍이는 것 같다.

중요한 사실은, 올바른 지혜의 생각들이 마법처럼 샘솟는다는 것이다. 소설을 쓴다면 장편 한편쯤은 쓸 수 있을 것 같고, 작곡을 한다면 모차르트의 상상력을 초월할 듯하다. 또 그림을 그린다면 빈센트 반 고흐와 대적할 만한 걸작도 나올 법하다.

숯가마 화기에서 뿜어 나오는 대자연의 물질이 인체와 접촉할 때 발생하는 신기한 생체의 메커니즘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삶의 가치를 충분히 느끼는 숯가마 나들이다.

김원호 울산대 국제학부 명예교수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