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통역관으로, 교사로, 창고업자로
제45화 통역관으로, 교사로, 창고업자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9.07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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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빈 자리 장남인 내 차지가 되어
예상밖의 엄청난 부채에 눈앞이 캄캄해

아버지께서 비운 자리는 장남인 내 차지가 되었고, 여태 몰랐던 집안의 재정 상태를 알게 되었다. 넉넉하지 않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으나 예상 밖의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을 몰랐었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미군 통역관으로 받는 월급이 많아 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지만 엄청난 부채는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서툰 영어 솜씨로 1년을 근무했더니 몸에 무리가 왔고, 어머니와 아내는 행여나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될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 결국 만성 피로에 시달리다가 병이 재발할까 걱정이 되어 통역관 생활을 청산했다.

통역관을 그만두고 집에서 요양 겸 치료를 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울산 시내의 몇 몇 학교로부터 교직 제의가 들어왔다. 교사 생활을 한다는 것을 상상해 본 적도 없는데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교직을 제의하는 학교는 점점 많아졌다. 결국 여러 학교를 검토한 후, 울산중학교(현 학성중학교)에서 영어와 과학을 가르치기로 하고 몸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수업시간표를 조절하여 교사가 되었다. 많은 학교들 중에서 울산중학교를 선택한 것은 우리 집과 가장 가깝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울산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2년쯤 하다가 학교를 신설하는데 뜻을 같이 한 두 사람과 의기투합하여 본격적인 학교 설립 준비를 시작했다. 여자고등학교를 신설하기로 하고 관할 관청으로부터 설립에 필요한 허가를 얻었다. 학교로 사용할 건물을 여기저기 수소문하던 끝에 울산중학교 근처에서 장갑공장을 하던 건물을 매입하여 ‘울산여자고등학교’를 세웠다.

허름하던 장갑공장을 수리하여 학교 간판을 내걸고 편입생들로 반을 구성해 수업을 시작했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라 학교시설은 열악했지만 배움을 열망하는 학생들의 열기가 뜨거웠고, 선생님들 역시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다른 학교를 다니다가 우리 학교로 전학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개교한지 1년 만에 1회 졸업생과 2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울산고등학교에서 시간강사 노릇까지 했었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기쁨에 몸이 고된 것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보낸 시절이었다.

그때의 젊음이 그립다. 남다른 보람과 긍지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아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배움을 익히는 아이들에게서 우리의 앞날이 밝아오는 것을 느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마음이 가벼워서일까, 학교 설립과 운영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지병인 폐결핵은 호전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X-레이를 찍어보면 그때 앓았던 폐결핵이 석회화되어 딱딱하게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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