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끝과 시작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12.01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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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잠을 설쳤을 것이다. 미리 싸둔 가방을 관물대 위에 올려놓고 밤새 아침을 기다렸을 것이다. 아침밥도 거부한 채 맡겨놓은 휴대전화를 찾아들고 마치 무슨 위험한 경계선이라도 넘듯 군부대 문을 조심스레 나왔을 것이다.

들길을 조금 지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작로까지 걸어 나왔겠지. 이미 빈들이 되어버린 들판과 절반은 잎들을 내려버린 산들을 바라보며 버스를 타고 조금씩 번잡해지는 민간인의 거리로 스며들어갔을 것이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걸음에 정작 자신도 놀라며 흥분된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드디어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것 같은 낯선 자유로움에 내내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곤 승차권을 사려고 매표창구 앞에서 줄을 서 있는 동안 잠시 작은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집으로 먼저 가야할까, 아니면 지금쯤 학교에서 청춘을 불태울 친구들이 있는 학교 캠퍼스로 가야할까를. 휴가 나온다는 소식에 친구들과 그렇고 그런 약속들을 했을 테니까.

새벽부터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생각하며 잠을 설쳤다. 이른 아침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저 학교에 먼저 좀 갔다 갈게요. 오후쯤 집에 도착합니다.” 조금은 예상했던 소식이다. 작은 아이가 군대 전역을 얼마 앞두고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 삼월의 꽃샘추위에 짧게 깎은 머리가 더 추워 보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 시작이 몇 계절을 넘나들어 벌써 마침표를 찍게 됐다. 그동안 정작 본인은 힘들었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 시간을 짧게 기억한다. 그런데 아이는 군 복무가 끝나기도 전인 이미 한두 달 전부터 제대 후 계속해야 할 학업과 졸업 후 진로 등으로 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

부모 마음엔 제 삶에 대해 고뇌하면서 성숙해 간다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지만 이제부터 정말 힘든 시간의 시작이구나 싶은 마음에 애처로움이 크다. 그러나 모든 것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몫이기에 시작과 끝의 두려움조차 의연히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우리는 끝없이 무언가 시작하고 끝을 내고 다시 또 시작하면서 살아간다. 하루의 시작, 한 해의 시작, 한 인생의 시작……

한 해가 지나는 길목에서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끝이 분명했던 아이의 지난 시간의 종결점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무엇의 시작임을 보며 시작과 끝은 동의어가 아닐까 생각했다. 진부한 말이긴 하지만 결국 인생은 시작도 끝도 없이 한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연속의 시간일 뿐일까. 이제 나 자신조차도 거창한 시작을 꿈꾸지 않는다. 그냥 작고 두렵지 않은 선택을 할 뿐.

……

영화를 좋아한다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

주장하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

폴란드 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의 시 ‘선택의 가능성’에서처럼, 또 다른 끝과 시작에서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진중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선택의 시작을 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정미 수필가 / 나래문학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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