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통역관으로, 교사로, 창고업자로
제44화 통역관으로, 교사로, 창고업자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9.04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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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앞두고 입대 신체검사서 군대 면제 받아
미군통신대서 통역관 구해 첫 직장생활 시작

의료계에는 ‘국제장교’라는 새로운 호칭이 유행되었다. 어제까지 인민군 장교였다가 오늘 아침에는 국군장교로 계급장을 달고 일하는 모습을 보고 서로 멋쩍어 하는 자괴심(自愧心)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로 변해있었다. 다행히 의과대학 건물과 부속병원은 폭격을 피했고, 학교수업은 재개되었다.

인민군들이 사용했던 건물과 인민위원회가 상주했던 건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미 공군의 폭격이 정교해 민간인들의 건물보다는 인민군과 관련된 건물 위주로 폭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들 속에서 치워지지 못한 시체들이 삐죽이 보이기도 하였다. 어수선한 시국 속에서도 서울대학교는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암기위주의 지루한 수업을 받고 있다가 인민군 병원에 투입되어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이론과 실무를 동시에 익혔고, 이론에 치우친 의과대학의 막바지 임상교육보다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졸업을 몇 개월 앞두고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폐결핵을 앓고 있었던 나는 ‘병’ 등급 판정을 받고 군대를 면제받았다. 아마도 전쟁 통에 겪은 고생들로 몸이 많이 약해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어려서 앓았던 늑막염도 심리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 같았다. 하여간 군 문제가 해결되고 학업을 무사히 마무리 한 후, 졸업장과 의학사증을 손에 쥐고 울산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약해진 몸을 다스리며 폐결핵 치료에만 전념하고 있는데, 울산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통신대에서 통역관을 구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던 창고는 텅 빈지 오래되어 집안 사정이 어려울 때, 밥만 축내고 있기가 여간 미안하지 않던 나는 바로 통역관에 지원했다. 미 대사관에서 번역을 했던 나는 무난히 통역관이 되었고, 나의 첫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첫 월급 11만원, 남들이 돈 세는 것을 볼까봐 화장실에서 몰래 세어본 11만원을 받아서 아버지께 고스란히 드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받았던 한 달 월급 11만원은 일반 노동자의 1년 벌이와 맞먹는 큰 액수이었다. 전후 변변한 일자리가 없는 국내 여건상 내가 미군에 취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내 월급봉투를 열어보지도 않으시고 방안 앉은뱅이책상 위에 열흘 가까이 두고 계셨다. 행여 손님이 오시면 꼭 월급봉투를 자랑하시며 장남의 위신을 추켜세우셨다.

그러나 내가 취직을 해서 매월 받아오는 월급봉투를 몇 번 받아보지도 못하고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떠나셨다. 항상 말없이 힘이 되어 주시던 아버지께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쓸쓸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이 든다. 언제나 강직한 모습으로 집 안팎에서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시던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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