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1월 26일 극립극장 소극장에서는 (사)진주민속예술보존회 주최로 ‘진주 전통무용 발표공연’이 열렸다. 공연 종목은 진주검무, 양산학춤, 승무, 살푸리춤, 양반춤, 한량무 등 6가지였고, 한량무가 중심이었다. 김덕명, 성계옥, 정행금, 김연이, 서정남, 정필순, 김정애, 최금순, 정금순, 김성인(金性仁) 등 10명이 공연에 참여했다.
셋째, 김덕명은 진주 출신이 아니다. 김덕명을 진주로 초청한 박새제 (사)진주민속예술보존회 이사장이 지병도 없이 졸지에 돌아가셨다. 그 후 박 이사장을 믿고 진주에서 예술활동을 하던 김덕명으로서는 진주에서의 예술활동이 어려워졌다. 도 지정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한량무의 이름으로 김덕명이 진주에서 활동하는 것이 진주 토박이 예술인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김덕명은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대학 강단에서 무용과 학생들을 가르친다. 1982∼1987년은 부산여대 강사로, 1984∼1990년은 부산대 예술대학 무용과 강사로 출강하면서 춤 전공 학생들에게 춤을 지도했다. 또한 1985∼1993년에는 ‘김해시립전통무용단’ 단장을 맡으면서, 김해문화원 등에서 민속예술을 지도했다. 1979년 한량무가 경남도 지정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받은 지 37년이 되었지만 현재도 우여곡절 같은 사연이 많다.
넷째, 고향 양산에서의 예술활동은 순조롭지 못했다. 김덕명은 1996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고향 양산에서 머물면서 양산시민대상(2011년), 경상남도문화상(2014년)까지 받았지만 고향에서의 예술활동이라 해서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현재 연로한 한량무 예능보유자들은 1970년대 부산 장전동에 있던 우리 집에 배움과 연습 그리고 공연 등으로 출입이 잦았다. 그분들은 사십대 초·중반, 오십대 초·중반의 연령으로 모두 젊었다. 당시 20대 말인 필자가 아버지를 따라 공연을 다니면 “총각은 인물도 좋고 공부도 했는데 춤을 와 출라카노. 장가가서 잘 살지”라고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세월이 흘러 현재는 몇 분만 생존해 계시지만 활동이 자유스럽지 못하다고 전한다. 다행히 올해 80나이지만 활동에 지장이 없으신 정행금 선생님을 중심으로 한량무가 전수되고 있다니 아주 반가운 소식이다. 경남도는 올해 1월 23일 ‘전승활동을 인정받은 정행금 보유자를 중심으로 전승활동을 해 주시기 바라며, 기존 이수자 등과 함께 뜻을 모아 한량무가 우수한 무형유산으로 보존, 전승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린다’는 공문(‘한량무 정상화 노력 촉구’)을 진주시와 한량무 회원들에게 발송했다.
그리고 7개월이 지났다. “매주 금요일 오후 2시면 진주시 전통예술회관에는 정행금 보유자를 중심으로 한 전수교육에 30여명의 회원들이 몰리며 대반전을 거두고 있다.”(뉴스경남. 2015.09.08. 진주 한량무 ‘갈등·분열 봉합’ 화제) 현재도 사용하고 있지만 한때 ‘한량무’의 정식 명칭이 진주의 예술관계자 몇몇에 의해 슬그머니 ‘진주 한량무’로 둔갑된 적이 있었다. 이를 뒤늦게 발견한 김덕명은 인부족 세부족의 환경을 이겨내고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한량무를 연구할 후학들을 위해 기억을 더듬어 간략하게 밝혀둔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조류생태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