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아! 짧은 만남 그리고 긴 이별
10월, 아! 짧은 만남 그리고 긴 이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11.0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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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이 살아서 헤어지는 것이라면 사별은 죽어서 멀어지는 것이다. 인생살이 주변에는 이별과 사별이 수시로 번갈아 일어난다. 이별이든 사별이든 떠나감은 가슴 아픈 일이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헤어짐에도 아쉬움이 있다. 하물며 헛된 약속조차 없는 죽음으로 사라짐은 작약(雀躍), 곡용(哭踊)을 해도 모자람이 있을 것이다.

지난달 20일부터 26일까지 2박3일간씩 스무 번째 1차(20∼22일), 2차(24~26일)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있었다. 짧게는 60년 길게는 66년의 헤어짐 끝에 그들은 만났다. 그리고 12시간의 짧은 만남 끝에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만 했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매듭을 풀어내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 흘렀다. 사연을 전하는 방송을 볼 때마다 내 가족인양 눈물을 찍었다. 원숭이도 새끼와의 사이를 인위적으로 갈라놓으면 그 어미의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낀다고 하지 않던가. 어찌 원숭이뿐이겠는가. 아!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은 10월의 짧은 만남 그리고 긴 이별로 막을 내렸다. 올해 금강산 단풍이 유달리 붉은 것은 아마도 이산가족의 피눈물이 더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별은 눈물과 아쉬움 그리고 아침으로 끝났다.

정지상(鄭知常, ?∼1135)은 「송인(送人)」에서 이별의 아픔을 눈물로 표현했다. “비 개인 긴 둑엔 풀빛이 푸른데/ 남포에서 그대를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른다./ 대동강 물은 언제 다 마를까./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김명원(金命元, 1534~1602)은 “창밖은 야삼경 보슬비 내리는데/ 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이 알리라/ 나눈 정 미흡한데 벌써 날이 새려하니/ 옷깃 부여잡고 후일 기약만 물어대네”라는 글에서 이별을 당사자만이 느낄 수 있는 아쉬움으로 정의했다. 신윤복(申潤福, 1758년 ~ ?)도 김명원이 표현한 아쉬움이 마음에 남았던지 훗날 달밤에 연인을 그려놓고 「월하정인(月下情人)」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몇 자 적었다. “달은 기울어 밤은 삼경인데/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알겠지(兩人心事兩人知”라고 표현했다.

가수 김종찬은 「사랑이 저만치 가네」라는 노래를 통해 “사랑이 떠나간다네/ 이 밤이 다 지나가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겠지/ 사랑이 울고 있다네/ 이별을 앞에 두고서/ 다시는 볼 수 없음에/ 가슴은 찢어지는데/ 이제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네/ 사랑이 떠나가네/ 나는 죽어도 너를 잊지는 못할 거야/ 아침이면 떠날 님아”라고 하여 사랑은 아침이면 떠날 님임을 강조한다. 가수 임재범은 아침을 버리고 밤을 택했다. 「이 밤이 지나면」이란 노래에서 “불빛만이 가득한 이 밤/ 그대와 단 둘이 앉아서/ 그대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네/ (……) / 이 밤이 지나면 우린/ 또 다시 헤어져야 하는데/ 아무런 말없이 이대로/ 그댈 떠나보내야만 하나”라고 하여 연인을 이 밤이 지나면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한다. 가수 주현미는 「내일 가면 안 되나요」라는 노래에서 아예 내일을 강조한다. “오늘은 가지 말아요, 내일 가면 안 되나요/ 오늘밤 샴페인을 터뜨리면서 말 한마디 남기고 떠나요/ 별로 할 말은 없지만 함께 있으면 행복해요/ 기약 없는 이별인데 내일 가면 안 되나요”라고 하여 기약 없는 이별을 내일로 미루자고 간청한다.

지난달 23일 양산학춤의 3대 계승자인 아버지 김덕명(1924∼201 5)이 영면에 드셨다. 설령 부모가 천수를 누렸다 해도 봉송은 슬프며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 자식 된 마음이다. 오구굿, 진오귀굿, 새남굿, 씻김굿, 천도재는 다 그런 마음에서 지낸다. 아무리 인생은 생·노·병·사로 선순환 한다 하지만 우리와 나의 부모만큼은 살짝 비켜 가리라 염원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러나 죽은 자의 안내자 저승사자는 모든 생명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차등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새벽 1시 30분, 아버지는 길게 내뱉는 이승의 마지막 거친 숨을 끝으로 장남의 팔베개를 하신 채 조용히 저승의 안내를 받으셨다. 이승의 92페이지가 덮어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긴 여행을 저승사자에게 부촉하여 명도의 길로 떠나셨다. 사별에 익숙한 필자의 삶이지만 막상 아버지와의 사별은 충격이었다. 며칠간은 일탈에서 헤매었다. 유족의 오열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이승에서의 주검은 꽃신 신고 반듯하게 누워 오랜 잠에 빠지셨다. 발인(發靷)은 한 줌의 재가 되길 재촉했다.

김덕명은 1924년 3월 22일, 경상남도 양산군 동면 내송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현민과 어머니 이선령 사이에서 5남 2녀 중 5번째로 태어났다. 슬하에는 2남 3녀를 두었다. 1970년대에는 부산, 1980년대에는 진주, 1990년대부터 운명할 때까지는 양산에서 각각 활동했다. 경상남도 지정 무형문화제 제3호 한량무의 예능보유자였다. 2014년 경남도 문화상을 수상했다. 아버지는 마침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묻혀 있는 양산시 동면 내송리 선영에 안장되셨다. 칠백은 한 줌의 재 되어 천광에 묻고 삼혼은 반혼재로 모셨다.

49일재를 붙이고, 삼우제와 초재를 지냈다. 억겁으로 보면 63년의 짧은 아버지와 아들의 연이었다. 제4대 양산학춤 계승자의 연을 뒤로하고 긴 이별을 했다. 물어봅니다. 영가시여! 삼혼묘묘귀하처(三魂杳杳歸何處)이며 칠백망망거원향(七魄茫茫去遠鄕)이니까?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조류생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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