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다시 의과대학으로
제43화 다시 의과대학으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9.02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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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에 가족애 ‘울컥’
복구 작업으로 서울은 조금씩 활기 찾아가

유엔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도로다운 도로가 없었을 때였는데 덜컹거리는 화물차 한 모퉁이에 야윈 몸을 싣고 올라오신 아버지의 자식사랑에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버지께서는 “네가 서울이 아니라 평양에 있었다고 하여도 반드시 너를 만나러 갔을 것이다”라고 하시며 잡은 손을 놓지 못하셨다. 항상 강직하고 완고하시던 아버지의 모습만 보다가 눈물을 흘리는 약한 아버지의 모습을 처음 본 나는 더욱 더 진한 가족애를 느꼈다.

3일 후, 우리 식구들은 보급물자를 싣고 울산으로 돌아가는 화물차에 실려 그리운 고향 울산으로 향했다. 동족상잔의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고, 죄 없는 병사들의 죽음이 온 산하를 핏빛으로 물들이며 지루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남쪽과 북쪽의 전투는 결국 강대국들이 임의로 만든 38선을 기점으로 다시 나뉘었다. 승자도 패자도 없이 한반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6·25 전쟁은 휴전으로 멈추었다.

전쟁이 멈추고 피난을 떠났던 사람들이 하나 둘 제 집으로 돌아갈 때, 나 역시 서울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좀 더 상황을 지켜보다가 가도 늦지 않다며 말렸지만 서울 소식이 궁금하고 학교 사정도 알아볼 겸 서둘러 서울로 돌아왔다.

전쟁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서울은 참혹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파괴되어 있었고, 형태를 유지한 건물들도 시가전의 상처가 뚜렷하게 남아, 흉물스러웠다. 종로와 을지로를 통틀어 유명했던 극장 단성사와 국도극장이 겨우 형체를 남겼고, 서울역은 지붕조차 없어져버렸다. 집이 파괴되어 갈 곳 잃은 사람들과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넘쳐났고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일자리를 찾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눈에는 휑한 공포가 가득했다. 모든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어려웠고, 안정되지 못한 정치상황 때문에 전후 복구 작업은 한 없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도 서울은 조금씩 예전의 활기를 찾아가고 있었고, 거리에는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기쁜 웃음으로 서로를 반기며 그간의 사연들을 전하기 바빴다.

오랜만에 나가 본 대학에서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인민군 점령 당시에 서울대학교와 서울시내 각 병원에서 인민군 의무군관으로 근무한 교수들과 학생들이 새로 들어선 군부의 명령으로 국군에 입대하여 의료장교로 활동하고 있었다. 인민군 장교였던 사람들이 어느새 대한민국 국군장교로 둔갑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서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강을 건너간 사람, 도강파와 건너가지 않고 남아서 숨어 있었던 비도강파, 또는 잔류파’의 분란이 없었던 점이다. 아마 이것은 ‘의사’라는 전문직,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에 나오는 인류애 때문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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