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수호의 공로는 박어둔이 안용복보다 크지요”
“독도 수호의 공로는 박어둔이 안용복보다 크지요”
  • 김정주 기자
  • 승인 2015.10.20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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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 스님 박어둔선양회 회장·정토사 주지
독도의날 행사, 日안보법안 통과로 앞당겨
 

‘독도의 날’은 매년 10월 25일이다.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칙령 제41호에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명시한 날이 1900년 10월 25일이었기 때문이다. ‘독도의 날’은 이 날을 기념하고 일본의 야욕으로부터 독도를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제정됐다.

덕진 스님이 독도의 날 행사를 예정보다 12일이나 앞당긴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일본 아베 정권의 안보법안이 지난 9월 끝내 일본 참의원 본회의를 통과했기 때문이었다. 박어둔 선양회는 이 법의 적용 대상 제1호가 독도가 될 것이며, 동해가 재무장한 일본 함대의 텃바다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고 판단했다.

이날 덕진 스님이 선창한 결의문은 신도들의 마음도 움직였다. “하나, 우리는 일본 수상 아베의 안보법 통과로 우려되는 동해 지배와 독도 침탈의 위협을 규탄한다. 둘, 우리는 박어둔 님의 정신을 이어 과거 식민 강점기 시대처럼 우리 국토가 마구 유린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앞장선다. 셋, 일본 수상 아베는 즉시 안보법을 폐기하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라.”

“독도 만세! 박어둔 만세!”를 정토사 신도들도 따라 외쳤다. 이날 행사에는 ‘경주 박씨’ 박어둔과 본이 같아 초대받은 경주 손님 두 분도 자리를 같이했다. 박효길 경주박씨종친회장, 박정웅 숭덕전선양회 역사연구회장이 그분들. 박어둔 선양회의 산파역이나 다름없는 이양훈 이사(전 KBS 프로듀서)와 김문길 이사(한일문화연구소장, 전 부산외대 교수)는 박어둔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박어둔은 목도 살며 마태염전 일군 소금부자”

박어둔 연구가인 이양훈 이사는 경주 박씨 박어둔은 조선 인조 대에 몰락한 양반 집안의 후손이라고 단정 지었다. 1687년 이전에는 울산 대현면에서 살다가 1693년에는 청량면 목도리(방도리) 12통으로 이사했고, 당시 목도의 이름은 ‘보리포’였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박어둔이 청량 ‘마태염전’의 ‘염간(鹽干)’으로서 ‘독도 수호의 상징’으로 알려진 안용복과는 달리 노비가 아니라 그를 경제적으로 도운 ‘양인(良人) 신분의 소금부자’였다고 주장했다. 또 그의 조부 박국생이 인조 때 충청도에서 울산으로 사민(徙民=강제이주)당하게 된 연유, 그리고 처가와 외가에 관한 연구 결과도 공개했다.

김문길 이사는 태평양전쟁 직후 일본을 통치한 맥아더의 연합군총사령부가 독도와 관련해 박어둔을 처음 인지한 사료 ‘에도 시대의 돗토리 현의 상황’(일본 시마네현 작성)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 그는 이 문서가 박어둔의 존재나 활약을 부정하는 논리를 뒤집을 결정적 자료라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 쪽 사료를 인용해 동래 사람 안용복이 노비 신분의 일본어 통역사(和語通詞)였고, 울산 사람 박어둔은 ‘양인 신분의 지식인’이었다고 했다. 김문길 이사는 1992년 일본 고베대학에서 일본문화사를 전공한 부산외대 교수 출신 학자다. 지난해에는 대마도 히코텐성의 남쪽 끝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귀무덤’(천인총) 기록을 찾아냈고, 1995년에는 오카야마현 쓰야마시에서 조선인 포로의 귀무덤을 발견한 적도 있다.

덕진·이양훈·김문길 3인, 목도에 ‘박어둔 기념판’

박어둔 선양회가 꾸려진 시기는 지난해 8월. 하지만 정식 창립총회를 가진 것은 ‘독도의 날’ 하루 전인 같은 해 10월 24일 정토사에서였다. 이 모임의 성격은 ‘창립 목적’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 시대에 울릉도와 독도에는 조정의 공도화(空島化) 정책으로 사람이 들어가 살지 못했고, 이를 틈타 일본 호키(伯耆, 현재의 돗토리)의 어부들이 울릉도와 독도에 무단으로 침입, 어로와 벌목을 일삼았다. 서기 1693년(숙종 19년)에 동래 어부 안용복과 울산 염간 박어둔은 일본 호키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서류를 받았지만 귀국길에 대마도에서 빼앗기고 말았다. 3년 뒤인 1696년에 다시 바다를 건너가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보람이 있어 호키 수(돗토리 번주)는 일본인의 조선 도해(渡海) 금지령을 내렸고, 이에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으로 확보되었다. 울산 염간 박어둔은 이 위업에 선박과 자본을 댄 인물이다. 그러나 박어둔은 아직 잘 알려진 안용복만큼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본 선양회는 박어둔의 행적과 공로를 찾고 이를 널리 선양코자 한다.”

뜻을 같이한 덕진, 이양훈, 김문길 3인이 선양회 창립에 앞서 저지른(?) 일이 있다. 박어둔이 살던 곳으로 밝혀진 목도 건너편 나루터에 ‘독도를 지킨 민족 영웅 박어둔의 마을 목도’란 이름으로 이른바 ‘박어둔 생가 기념판’을 세운 것. 지난해 3월 31일 현판식을 가졌고 이곳 터줏대감 S-OIL도 힘을 보탰다. 기념판 글 뒷부분은 새겨들을 만하다. “아, 박어둔은 갔어도 저기 푸른 섬 목도는 박어둔의 얘기를 들려준다. 우리 바다를 노리는 주변의 침탈이 드세어지는 이 때에 독도를 지킨 박어둔 염간을 기려 그의 고향 목도에 판을 세운다.”

구마모토 본묘사의 일요 스님과는 같은 고향

박어둔 선양회를 중심으로 3인이 의기투합한 배경이 궁금했다. 덕진 스님이 사연을 들려준다. “이양훈 이사와는 20여년 지기이지요. 울산문인협회 회원이기도 하고. (덕진 스님은 詩분과, 이양훈 이사는 小說분과 소속이라 했다). 작년에는 울산향토사를 강연하면서 정토사 신도들에게 울산의 불교 유적들을 소개도 했고.”

1995년에 펴낸 ‘불교천자문’은 서점가에서 불교서적으로서는 1년 넘게 베스트셀러였고 지금도 서가를 떠나지 않는다. 이양훈 이사가 ‘특이한 책’이라 해서 KBS ‘6시 내 고향’에 소개해준 덕분이라 했다.

김문길 이사는 임진왜란 당시의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의 원찰(중심사찰)인 일본 구마모토시의 본묘사(本妙寺) 주지를 만나 이 절에 전해오는 ‘일요(日遙) 스님’의 기록과 구도비를 찾아내 KBS에 특종보도의 기회를 안겨준 분이다. 어느 기록에 의하면 속명이 여대남(余大男, 1580∼1659년)인 ‘일요 스님’은 임진왜란 중에 경남 하동군 양보면 ‘보현암’에서 글공부를 하던 중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 다카하시에 의해 납치돼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본묘사의 3대 주지가 된 분으로, 애틋한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진다.

덕진 스님은 이러한 사연을 간직한 본묘사를 2011년 울산문인협회의 한일교류 행사 덕분에 방문한다. 덕진 스님의 일요 스님에 대한 기억은 예의 기록과는 조금 차이가 난다. 10대 어린 스님(사미승)이 기거하던 절이 하동군 양보면 정한산의 ‘쌍계암’이라고 기억한다.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 때 왜군 병사가 산을 수색하다가 발견하고 위협하자 일요 스님은 총칼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하고 소신 있게 나무랐고, 왜군 병사가 그를 죽이지 못하고 가토에게 데려갔다는 일화가 있답니다. 또 본묘사는 사명스님(사명대사)이 가토와 조선인 포로 송환 문제로 담판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고요. 일요 스님 이야기가 알려진 뒤 구마모토JC가 스님이 태어나고 자란 경남 하동군 양보면에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이 제 고향도 하동군 양보면이니 대단한 인연인 셈이지요.”

당연지사이겠지만 덕진 스님은 인연(因緣)을 몹시 소중하게 여긴다. 이양훈 이사와의 연(緣)이 김문길 이사, 이상태 선양회 사무국장(전 현대중학교 교감)과의 또 다른 연으로 이어진 것도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 때문이라 믿는다.

뒤늦은 연이지만 일본에서 사료(史料)를 자주 찾아서 챙겨주는 김문길 이사에 대한 스님의 생각은 의외로 깊다. “그분은 독도 수호에 안용복보다 박어둔이 더 주인공 역할을 했고, 그런데도 묻혀버린 게 안타깝다고 늘 애석해 하지요.”

돌이켜보면 지난 1년은 독도 수호의 또 다른 상징인물 박어둔의 발자취를 더 한층 깊이 파헤치려고 애쓴 한 해였다. 그 보람이 지난 13일 박어둔 공의 위패 봉안과 위령 의식으로 나타나지 않았던가.

 

▲ 지난 13일 오전 설법전에서 ‘박어둔 公 위패 봉안 및 위령 의식 ’을 마친 내 ·외빈들이 정토사 종무소 옆 건물의 ‘울릉도 ·독도 수호 박어둔 선양회 현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선양회원 수는 적어도 신도들이 든든한 후원자

회원 수도 궁금했다. 덕진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문을 연다. “사람 모으기 쉽지 않습디다. 뜻을 같이하는 분이 많지는 않고, 한 20명 남짓 될 겁니다.” 웃을 때 그의 모습은 자력(磁力)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누가 보아도 선하고, 어진 인상이다. ‘순진무구’, ‘온유’, ‘자비’란 수식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박어둔 선양회에 대한 신도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스님이 답을 한다. “처음엔 ‘그런 것도 있나?’ 하는 표정이던데 요즘은 다르지요. 몇 차례의 이벤트와 언론보도 덕분인지 인지도가 조금은 높아진 모양입니다.”

지난 13일의 설법전 행사에 대해서도 먼저 말을 꺼낸다. ‘3자 회동’ 때 나온 이야기라 했다. “신도들이 이런 행사, 꼭 절에서 해야 하나? 본연의 수행도 포교도 아닌데 하고 의아해 할지 모른다는 의견이 있었지요. 알고 보니 안용복의 두 번째 도해(渡海)담판 당시 조선불교 스님 여러 분이 동행한 사실이 사료에도 나오는데, 이것도 발이 넓었던 박어둔의 영향력 덕분이라고 합디다. 박어둔이 처음 일본 갔을 때만 해도 스님 2명이 동행했다지 않습니까?” (이양훈 이사는 당시에 동행한 스님 중 1명은 재정, 다른 1명은 기록 담당이었다는 주장을 편다.) “그 시대나 지금이나 ‘나라 위한 일’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서 기념행사를 절에서 열기로 한 거지요.”

“성파 큰스님 맏상좌…불교대학 설립 큰 보람”

“출가는 27세 때인 1976년의 일입니다.” 덕진 스님은 행자를 거쳐 양산 통도사에서 ‘출가득도’를 한다. 정식 자격의 스님이 된 것이다. 덕진(德眞)’은 그 무렵 성파(性坡) 큰스님이 지어주신 법명이다, 덕진 스님은 그 이후 성파 큰스님의 ‘맏상좌’ 자리에 오른다. 종무소 전언에 따르면 속가의 이름은 ‘김·현·수’다.

덕진 스님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업적이 있다. 1997년 봄에 정토사 안에서 불교대학의 문을 연 일이다. 37기생을 배출한 지금까지 8천300명이 입학했고 5천명이 졸업했다. 종단(대한불교조계종)이 인정한 졸업생은 4천200명, 정토사가 인정한 졸업생은 5천명이다. 졸업 인정 기준(출석률)이 종단은 ‘80% 이상’인 데 반해 정토사는 ‘70% 이상’인 점이 이런 차이를 생기게 했다.

대학 설립 이유는 분명하다. 스님이 설법하듯 풀어낸다. “불교는 우리 문화를 지탱해온 정신적 지주인데도 조선시대에 이어 근자에도 변방에서 맴도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요. 불자들도 불교사상에 체계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맹목적으로 신앙하는 경향이 많았고. 불교를 제대로 알고 믿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 대학 설립을 결심하게 되었지요.”

입학 초기엔 남자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야간반은 남녀 비율이 비슷한 편이지만 주간반은 150명 대부분이 여신도다. 봄, 가을 두 차례 입학식을 갖지만 일반학교 학기제의 영향 탓인지 수강생은 봄철이 가을철보다 많다.

그 다음으로 손꼽을 만한 것은 지역사회에 ‘자비정신’을 심는 일이다. 울산시청 북문 근처에 있다가 지난여름 종하체육관 가까이로 자리를 옮긴 무료급식소 ‘밝은 세상’은 차린 지가 13년을 헤아린다. 봉사와 장학을 위해 4년 전 설립한 ‘사단법인 참 좋은 세상’도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는 중이다. 개인적으로는 ‘울산지방경찰청 경승(警僧)실장’, ‘사회복지법인 통도사 자비원 전문위원’ 직함으로 적지 않은 기여를 해오고 있다.

글= 김정주 논설실장·사진=김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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