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隨筆)을 위한 수필
수필(隨筆)을 위한 수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10.20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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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수필을 쓴 개인의 경험, 일상생활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특수한 일(사건)에, 또는 그 일이 매일 반복되는 일인데도 어느 날은 그 일에 관해 생각을 깊이 하게 된 것을 차분하게 정리한 것이다. 물론 어떤 사건을 겪어보지 않았어도 어느 날 밤, 잠에서 깨어나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한 생각에 멈추어 몰두하다가 그 과정을 글로 써내려간 것이 한 편의 수필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 ‘수필을 위한 수필’이 그렇게 시작된 글이다.

그는 어쩌다보니 전업(專業) 소설가가 되어 여러 권의 명작들을 남겼다. 그가 자신의 어느 소설을 두고, 쓰지 않고는 못 배겨 써내려 간 소설이라고 부끄럼을 타며 고백한 일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필가는 자다가 벌떡 일어나 쓰지 않고는 못 배겨 수필을 쓴다. 소설가를 작가(作家)라고도 하는데 작가는 한자(漢字) 풀이로 여러 가지 읽을거리를 만들어내는, 지어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에 비해 수필가(隨筆家)는 꾸며 만들어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허세를 부리거나 거짓말을 늘어놓지 않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글을 쓰는 사람을 말한다. 고(故) 김태길 선생님의 수필은 대부분 당신의 윤리학 배경, 철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거짓스러움이 없다. 생각의 실마리로 따지면 수필이나 소설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같은 실마리로 한 편의 단편, 장편 소설이 되기도 하지만 수필은 길어야 단편 소설의 분량이다.

소설에서는 ‘이것은 작가인 나의 철학입니다.’가 생략되거나 암묵적으로 소설 전반에 스며들기도 하지만(밀란 쿤테라는 소설가들은 소설 안에서 자신의 철학을 명확한 확신을 갖고 표현할 권리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막상 자신은 안 그랬다), 수필에서는 자신의 철학이 곳곳에 드러난다. 또한 이 점이 분명해야 수필이 잡문(雜文)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잡문은 어떤 형식을 갖추지 않기 때문에, 머릿속의 폭풍(brain-storming)과 비슷한 단계이다. 일기도 어떤 형식을 꼭 갖추어야 하지 않기 때문에 잡문의 범주에 들어가는데, 일기가 그렇듯이 잡문은 예술적 창조의 의의를 살리기 어렵다. 아니 기대하지도 않는다. 일기에 일종의 거짓, 허구가 들어가면 안 되는 점이 예술성의 창작(創作) 요소를 처음부터 거부했기 때문에 문학작품으로 간주(看做)하지 않는다. 그래서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문학작품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 일기가 예술성, 창조성에서는 한참을 못 미쳐 문학상을 받지 못한다. 전쟁의 의미를 사춘기의 소녀의 눈으로 담담하게 관조하고 있는 진정성에서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지 지금도 분단의 아픔 속에서 살고 있는 대한민국으로부터 어떤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 아니다.

일기가 잡문의 수준에 머물러도 탓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수필이 신변잡기(身邊雜記)의 잡문 수준에 머물면 독자를 우롱(愚弄)하여 시간낭비죄(?)에 걸리게 된다. 수필이 잡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수필가 자신이 쓰고 있는 그 사건(일)에 대한 철학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 점 때문에 아무나 수필을 쓰는 것은 아니다. 수필가의 철학과 독자의 철학이 달라서 질책과 배척을 당할 수도 있음을 각오하고 써야 한다. 여기서 ‘철학’은 세상사(世上事)에 관한 수필가 자신의 해석(解釋, inter-pretation)을 말한다. 해석의 한 예는, 어떤 일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고 물었을 때, 아무 말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 두고, ‘저 사람의 침묵은 반대한다는 뜻이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찬성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여간 ‘침묵’에 관한 해석, 사람들의 침묵에 관한 수필가의 철학이다.

어느 수필가의 수필을 읽으려면 글의 내용(사건과 이 사건에 대한 그의 해석, 철학)을 따라가기보다 그의 독특한 어휘 때문에 우리말 큰 사전을 보면서 읽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그 수필가의 어휘력 과시이지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의 철학이 담긴 수필이 아니어서 ‘수필을 위한 수필’을 여기서 썼다.

<박해룡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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