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솔정신
외솔정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10.14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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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오히려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연구하고 지켜낸 한글학자들의 분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켜낸 한글이 해방후에 오히려 위기를 맞게 된 일이 있었다. 이른바 ‘한글간소화 파동’이다.

정부수립 직후인 1949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갑자기 한글맞춤법 개정을 촉구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한글은 쓰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대통령은 예전처럼 한글을 소리 나는 대로 쓰기를 바랐다. 한글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그로서는 과학화된 한글맞춤법이 어렵게 느껴질 법도 했다. 하지만 이는 한글에 대한 일제강점기 한글학자들의 혈투와 한글의 과학성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4월 27일 정부는 한글 맞춤법을 소리 나는 대로 쓰자는 안인 ‘정부의 문서와 교과서 등에 현행 철자법을 폐지하고 구식 기음법(記音法)을 사용’이라는 제목의 국무총리 훈령을 발표했다.

이 때 울산 출신 한글학자인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은 정부방침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나섰다. 당시 문교부 편수국장이었던 외솔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전국을 돌며 형태주의 맞춤법을 강의했다. 이듬해에는 김법린 문교부 장관도 사임했다.

이 대통령도 강경했다. 그는 1954년 3월 29일 특별담화를 통해 “3개월 이내에 현행 맞춤법을 버리고 구한국 말엽의 성경 맞춤법에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그런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모신 사람도 있었다. 새로 임명된 이선근 문교부 장관은 ‘한글 간소화안’을 비밀리에 만들어 발표했다. 그 내용은 1921년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언문 철자법과 비슷한 것이었다. 학계는 이 맞춤법을 시대에 역행하는 것으로 여기고 반발했다.

결국 이 파동은 1955년 9월 19일이 대통령이 손을 들면서 끝을 맺었다.

이 과정에서 이 대통령과 외솔이 독대 담판을 벌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외솔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양보할 외솔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부 수립 초기에 일어났던 일이다. 민주주의가 아직은 서툴 때였다. 이 대통령은 당시 국부로 불리며 국민적 추앙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대통령도 결국 외솔을 비롯한 학자들의 설득을 받아 들였던 것이다.

해방과 동시에 남북이 분단돼 70년을 이어 오고 있다. 그럼에도 남북의 언어소통에는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일제강점기에 이미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북에서는 두음법칙을 무시하는 등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공동의 유산으로 함께 쓰고 있는 한글의 맞춤법에 큰 차이는 없다.

당시 한글간소화안이 그대로 통과됐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남북의 언어문자 생활에서 발생하는 격차로 겪을 문제점들을 생각하면 아뜩하다.

외솔은 연구실에만 머문 학자가 아니었다. 때로는 옥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한글의 위기를 맞아서는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병영에 있는 외솔기념관에 가면 ‘한글이 목숨’이라는 선생의 휘호를 볼 수 있다. 외솔은 목숨을 걸고 한글을 지켜냈다.

외솔정신은 한글을 잘 쓰는 것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잘 지켜내는 것에도 있을 것이다. 외솔의 고장 울산에서는 외솔정신을 이어나가는 데 앞장서고 모범이 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켜내야 할 것은 한글만이 아닐 것이다. <강귀일 취재2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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