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의 빛나는 결정체 ‘조선말 큰사전’
민족혼의 빛나는 결정체 ‘조선말 큰사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10.0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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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을 앞두고 의미 있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서울 도봉구에서 해마다 개최되는 백일장에 심사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스케줄을 점검해 보니 별 무리가 없어 기꺼이 수락했다. 학창시절, 백일장을 벗 삼아 지내던 신선함이 필자의 마음 한편에서 다시 꿈틀거리는 듯했다. 심사를 받던 문학소년이 이제는 엄정(?)한 심사를 해야 하는 자리에 서고 보니 두 어깨가 더욱 무겁기만 하다.

80년대 초에 상경, 출판사와의 소중한 인연을 맺은 지도 어느덧 30여년의 세월이 강물처럼 흘렀다. 그간 참으로 많은 책들이 이 세상의 빛을 보는 데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어 왔다. 그러나 겁 없이 뛰어들었던 출판편집 업무가 매우 신중함을 요구하는 어려운 작업이라는 사실을 해가 거듭될수록 새삼 느끼게 된다. 나의 주된 업무는, 번역·교정을 마친 내용물을 인쇄로 넘기기 전에 최종적으로 검토하는 일이다. 따라서 일단 업무가 시작되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살얼음판을 걷는다. 단어가 스칠 때마다 번역의 오류는 없는지, 문맥은 원활한지, 순화되지 않은 딱딱한 표현은 없는지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한다.

올해로 ‘한글학회’가 창립된 지 107돌을 맞았다.

‘한글학회’는 한국 최초의 민간 학술단체인 ‘조선어연구회’로 창립한 이래,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로, 1949년부터는 현재의 ‘한글학회’로 부르게 되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나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될 무렵에는 이미 국권이 피탈돼 일제의 탄압이 그야말로 극에 치닫고 있었으므로 우리말과 글을 떳떳하게 쓸 수도 없는, 치욕의 한(恨)을 피눈물로 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극악무도한 일제의 만행 앞에서도, 민족의 정기가 오롯이 살아 숨쉬는 ‘한글’을 수호하기 위한 눈물겨운 사건이 하나 있었다.

1945년 9월 어느 날, 조국이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광복의 희열에 들떠 있을 무렵, 경성역(현 서울역) 조선통운 운송부 창고를 뒤지던 경성제국대 학생들이 방대한 분량의 원고뭉치를 발견하고는 환호성을 지른다. 그간 행방이 묘연했던 원고를 찾기 위해 함흥 검찰청에 문의도 했고, 서울 검찰청을 뒤지기도 했으나 허사였는데 그토록 애타게 찾던 원고를 경성역 어두침침한 창고 한 구석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2만6천500여장에 달하는 이 원고뭉치는 ‘조선어학회사건’ 무렵, 일제에 사건 증거물로 압수당했던 ‘조선어사전’의 핵심원고였던 것이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어학회사건’은 1929년 조직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민족운동단체라는 누명을 쓴 채 학회 관계자들이 일본 경찰에 검거돼, 유죄를 선고받은 가슴 아픈 사건이다.

그 무렵 일제는 검거된 관계자들에게 온갖 협박과 혹독한 고문을 자행, 민족운동을 했다는 억지 자백을 받아낸 것은 물론 ‘조선어사전’ 원고를 그 사건의 핵심증거물로 압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국해방을 맞아 경성제국대 학생들이 집요한 추적 끝에 찾아내고야 만 ‘사전 원고뭉치’는 그야말로 하늘이 우리 민족에게 내린 엄청난 축복이었다. 일제의 온갖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말 사전 편찬의 뜻을 펼쳐 온 여러 학자들의 고초가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1947년 10월 9일, 드디어 ‘조선말 큰사전’ 제1권(을유문화사刊)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는 국가의 수립에 앞서 표준언어작업이 먼저 길을 열었다는 깊은 뜻도 담고 있었다. 하마터면 허공으로 사라져 오랜 세월이 지체될 뻔 했던 ‘조선말 큰사전’이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것이다.

이후 6·25 전쟁을 겪는 등,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 꾸준한 편찬작업을 진행한 끝에 ‘조선말 큰사전’은 1957년에야 6권 전질이 완성되었다. 하마터면 허공으로 사라져 오랜 세월이 지체될 뻔 했던 ‘조선말 큰사전’이 완간됨으로써 민족의 혼을 담은 빛나는 결정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제569회 한글날을 맞으며 우리말과 글을 지켜 내기 위해 헌신했던 선인들의 그 숭고한 희생 앞에 엎드려 큰 절을 올린다.

<김부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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