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한국인’ 두봉 주교
‘뼛속까지 한국인’ 두봉 주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10.04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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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꾸미는 수식어는 적어도 다섯 손가락은 넘는다. ‘농민의 아버지’ ‘가톨릭 농민운동의 대부’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의 벗’ ‘안동의 촛불’ ‘안동 꽃할배’ 그리고 ‘뼛속까지 한국인’이란 수식어들이다. 아흔을 바라보는 한국나이 87세의 르네 뒤퐁(Rene Dupont, 한국명 두봉 레나도) 주교. ‘성녀(聖女) 잔다르크’로 유명한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24세 되던 해에 사제(神父) 서품을 받는다. 신부의 길을 걷게 된 소이연에 대해 그는 ‘희생이 아닌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감히 말한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전도사 신부의 이름으로 한국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54년. 그의 나이 28살 되던 해였고, 그의 첫 부임지는 대전 대흥동 본당이었다. 그는 ‘뒤퐁’이라는 프랑스 이름을 버리고 ‘두봉’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새로운 신앙의 여정을 시작한다. 그때 그의 선언은 매우 인상적이다. “더 이상 과거의 나를 생각하지 않겠다. 이제 나는 한국인이다.” ‘폴리뉴스’ 기자는 그가 이 무렵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지오세)를 만들었고, 이 모임을 통해 농촌 출신 공장 노동자들의 복지 향상을 위해 힘썼다’ 고 소개한다.

천주교 안동교구의 탄생과 함께 주교로 임명된 두봉은 40세 되던 1969년, 안동교구장에 임명되면서 농민들이 스스로 만든 한국가톨릭농민회(JAC, 지아세) 활동을 적극 지원한다. 1964년 10월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소속 ‘농촌청년부’로 출발했다가 1972년에 독립한 가톨릭농민회는 정부의 농업정책을 농민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때론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79년 5월 정부의 불량 씨감자 배급에 항의한다는 이유로 납치-고문을 당하게 되는 ‘오원춘 사건’이 발생한다.

두봉은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구두끈을 조여 맨다. 그러나 결과는 후춧가루보다 더 매웠다. 안동을 축으로 전국을 뜨겁게 달군 이 사건으로 그에게 돌아온 것은 감시, 도청, 강제추방, 외교문제 비화라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참다못한 그는 교황청을 찾아가 소리를 높인다. “제가 사임하면 그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을 버릴 수 없습니다.” 한국 농민운동의 새 길을 닦은 그의 ‘목숨 건 투쟁’은 그에게 ‘농민운동의 대부’라는 수식어를 달게 한다.

이러한 사연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지난달 18일 밤 11시 15분부터 MBC 전파를 탔다. 14일 오전 7시 5분부터는 KBS 1TV의 ‘TV회고록 울림’을 통해 그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성직자, 농민운동가, 강연자, 그리고 친근한 이웃으로서 60년 넘게 한국인의 곁을 지켜온’ 그의 일대기 속에는 한국 최초의 전문대학 상지대를 설립하고 안동문화회관을 지어 지역민을 사랑했다는 이야기도 들어갔다.

9월 3일자 대구 매일신문은 이렇게 전했다. “2일 안동 메가박스에서 두봉 레나도 주교의 마지막 메시지를 담은 다큐멘터리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시사회가 열렸다.” 또 그에 대해 “사제 서품 이듬해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은 이후 62년 동안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고, 안동 사람보다 더 안동 사람답게 살아오면서 가난하고 억압받은 사람과 함께 사는 삶을 실천해 왔다”고 소개했다. “특히 이날 시사회 자리에는 ‘오원춘 사건’의 주인공 오원춘 전 가톨릭농민회 영양 청기분회장과 당시 두봉 주교와 함께 대정부 투쟁에 나섰던 가톨릭농민회 소속 농민들이 함께 자리해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는 대목도 덧붙였다.

두봉 주교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1970년대 중반, 경북 구미의 가톨릭농민회 전국본부에 몸담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분을 이번에 TV로 다시 만났으니 실로 40년 만의 재회인 셈이다. “다시 태어나도 한국인으로 살겠다”는 그에게 신(神)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기도드린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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