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고장 울주
기다림의 고장 울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9.30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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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이 가고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이해연의 ‘단장의 미아리 고개’)//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 봐도/웬일인지 오지를 않네 내 속을 태우는구려”(펄시스터즈의 ‘커피한잔’)// “기다리게 해 놓고 오지 않는 사람아/ 이 시간은 너를 위하여 기다리는 것인데/ 기다리게 해 놓고 오지 않은 사람아/ 나는 기다림에 지쳐서 이제 그만 가노라”(방주연의 ‘기다리게 해놓고’)// “남몰래 기다리다가 가슴만 태우는 사랑/ 어제는 기다림에 오늘은 외로움/ 그리움에 적셔진 긴 세월”(진미령의 ‘미운사랑’)// “기다리는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기적소리 끊어진 밤에”(진성의 ‘안동역에서’)

앞에 나열한 대중가요에는 모두 ‘기다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 삶의 일상은 기다림은 연속이며 우리는 여기에 익숙해져 있다. 등교한 아이와 출근한 남편을 기다리는 일상의 기다림이 있는가 하면 돌아가신 부모의 기일을 기다리는 일탈의 기다림도 있다. 뿌린 씨의 싹이 돋기까지 며칠간의 기다림이 있는가 하면 기약 없는 이산가족의 오랜 기다림도 있다.

병아리는 21일을 기다려서 부화한다. 선방은 석 달을 지내야 해제한다. 바늘 없는 낚싯줄을 강물에 드리우고 세월을 낚는 역사 속의 인물이 있는가 하면, 때를 기다리며 전문성을 연마하는 도광양회(韜光養晦)하는 사람도 있다.

토끼는 30일, 개는 62일, 돼지는 114일, 염소는 150일, 말은 285일, 사람은 300일을 기다려야 태어난다. 이 모두 인내의 산물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의 표현 역시 기다림의 선물이다. 왕위 계승도 기다림이다.

지난 8월 13일 새벽 5시 30분의 일이다. 깃의 옅은 색상으로 보아 올해 부화해 어미새로부터 독립한 듯한 몸집이 작은 왜가리 한 마리를 발견했다. 왜가리와는 약 20m 거리였지만 몸을 숨겨서 망원경으로 관찰했다.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키 큰 수초 사이를 미세한 움직임도 없이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그 모습 그대로다.

서서히 호기심이 생겼다. 관찰자 역시 숨죽여 자주 망원경을 사용했다. 이윽고 재빠른 움직임이 포착됐다. 부리에는 10㎝가량의 꺽지 한 마리가 날카로운 비늘을 세워 퍼덕였다. 습관적으로 시각과 시간을 체크하는 것은 필드의 기본 원칙 중 하나다. 34분을 작은 움직임도 없이 기다린 성과였다. ‘왜가리 여울목 넘보듯’이라는 속담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기다림이란 창자가 끊어지는 애타는 마음이다. 주검이나마 돌아오는 것으로 위로 받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 눈을 감을 때까지 가슴에 큰못을 박고 살아야 한다. 주검 앞에서 통곡의 용약(踊躍)과 작약(雀躍)은 무의미하다.

아내가 오랜만에 함께 있어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면, 괜히 지레 겁먹고 ‘가족끼리 왜 그래’ 같은 철 지난 개그로 분위기 썰렁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아내는 평소 남편과의 주고받는 안정적인 눈빛에서 친밀감과 애정이 싹튼다.

‘나이가 들수록 혼자 방을 쓰니 편하다’, ‘거실에 자는 것이 편하다’는 등 무심코 내뱉는 아내의 표현에서 이미 부부간의 섹스리스(sexless) 현상이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남편은 깊이 인식해야 한다. 뒤에서 안아주는 다정한 백허그(back-hug))에서 섹스리스의 고민은 잠시 잠깐 여명같이 사라진다.

이런 분위기는 수십 년 동거의 질곡이 있듯이 쉽게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손톱은 슬플 때마다 돋고 발톱은 기쁠 때마다 자란다’라는 말이 있듯이 손톱보다 발톱을 빨리 자라게 하는 아내와 남편이 되자. 그리고 아내에게 팔베개를 해주자. 들숨과 날숨에서 삶의 질곡을 함께한 유자껍질같이 넓어진 조강지처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쓰다듬어주자.

울주에는 물길로 떠난 임이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이별한 안타까운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망부석이며 다른 하나는 간절곶이다. 울주군 두동면 월평리에 가면 치술령의 망부석을, 서생면 대송리에 가면 간절곶을 만날 수 있다.

때로 ‘앙(鴦)’이 미워질 때 ‘원(鴛)’은 가쁜 숨을 참아가며 치술령에 올라 망부석을 찾자. 1500여 년 전 지아비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돌이 된 한 여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가끔 ‘홍실(紅絲)’이 미워질 때 ‘청실(靑絲)’은 간절곶을 찾자. 고기잡이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아직도 기다리는 ‘청실’의 마음을 느껴보자.

21세기는 의학의 발전으로 100세를 산다고 해도 무늬만 남편, 무늬만 아내로 살아가서는 의미가 없다.

서로 그리워하는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로 살자. 결혼과 사랑은 연리지(連理枝)로 만나 비익조(比翼鳥)로 날아가야 한다. ‘이성지합필수화목(異姓之合必須和睦)’이라 하지 않았던가.

새도 암컷과 수컷이 서로 화답하는 웅창자화(雄唱雌和)가 보기 좋고 듣기 좋듯이 부부의 부창부수(夫唱婦隨)는 말해서 무엇 하리. 기다림이 있는 큰 고을 울주이기에 원앙이 녹수를 만나 이혼 없이 해로동혈(偕老同穴)하는 어울렁 더울렁 태화(太和)로 살아가자.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조류생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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