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솔기념관에 회의실이라도 하나 마련됐으면”
“외솔기념관에 회의실이라도 하나 마련됐으면”
  • 김정주 기자
  • 승인 2015.09.01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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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태 외솔회 울산회장
 

지난달 31일자로 정년(停年)을 맞이했다. 38년 2개월이나 열정을 쏟았던 교육계를 정식으로 떠나게 된 것. 퇴임 행사는 조촐한 회식으로 대신했다. 고락을 같이해준 학교와 집안 식구들만 따로 모시고 석별의 정을 나눴다.

이성태 외솔회 울산회장(남목초등학교 직전 교장)에게 2세 교육에 대한 감사의 징표로 돌아온 것은 대한민국 홍조근정훈장. 이 훈장을 지난달 28일 오전 울산시교육청 외솔관에서 열린 훈·포장 전수식 때 받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각 그는 식장에 나타날 수 없었다.

현대호텔에 모인 ‘2015 전국 국어책임관·국어문화원 공동연수회’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베풀어야 했기 때문이다. 특별강의의 주제는 ‘나라사랑으로 겨레의 얼을 일깨운 외솔 최현배 선생’.

희망이 있다면 외솔기념관 안에 한글학회 울산지회와 같이 쓸 수 있는 울산외솔회 회의실이라도 하나 갖추는 일이다.

외솔은 훈장보다 더한 신앙적 존재

이성태 회장에게 외솔 최현배 선생은 신앙적인 존재나 다름없다. 사실 선생의 초등국어, 중등·고등 말본을 학생시절에 단 한 번이라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훈·포장 전수식보다 외솔 특강을 더 중시할 만큼 선생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다른 정도를 지나 신앙의 경지에 올라 있다.

외솔과의 인연은 28년 전인 1987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첫 부임지인 울산 청량초등학교에 발령받은 때가 1977년 7월 1일. 그러니 교단 입문 10년째가 되던 해였고, 외솔의 고향동네 학교(병영초등학교)에서 연구부장을 맡고 있던 시기였다.

그 무렵 울산은 산업공해와 비싼 물가로 전국적인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 회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대한알미늄은 중금속 공해가 심했고, 삼산들은 공해에 찌들어 농사도 잘 안됐지요. 외지인들에게 정주(定住)의식이란 눈곱만큼도 없었고, 기회만 있으면 떠나려고 했지요. 울산을 그저 공업으로 일어선 신흥도시쯤으로 인식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회장은 울산은 그런 곳이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하고 싶었다.

“공해도시 오명, ‘인물고장’으로 바꾸었으면”

예부터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풍수해 없고, 먹고살기도 궁핍하지 않은 사람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울산의 자랑거리를 애써 찾아 나섰다. 궁리 끝에 생각해낸 것은 ‘인물’이었다.

이 회장은 어느새 울산이 배출한 인물 한 분 한 분의 면면을 짚어나가고 있었다. ‘인물 나는 도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였다. 박제상, 박상진 어른의 이름이 떠올랐다. ‘신라충신’ 박제상은 전설적 인물이어서 피부에 잘 와 닿지 않을 것 같았다. 박상진 광복회 총사령은 젊은 나이에 너무 일찍 순절해 어딘지 허전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분이 외솔 최현배 선생. 한글을 ‘목숨’처럼 지킨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 바로 이분이야말로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다 아는 훌륭한 분이 아니시던가. 이 회장이 외솔에 대한 집념을 불태우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그러나 외솔회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7년 후, 1994년의 일이었다.

울산외솔회 초창기 회원, 쟁쟁한 분들

이 무렵 외솔회 울산회장은 고인이 된 박영출 선생이 맡고 있었다. 회원 중에는 당시로서는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 있는 ‘쟁쟁한 분들’이 참 많았다. 그러나 버팀목이 약해서일까. 울산외솔회는 이름만 남은 채 점점 야위어 갔다. 2005년 즈음 재조직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외솔회 울산회장’ 직함이 이성태 회장에게 돌아온 것은 4년 후인 2009년이었다.

이 회장은 ‘회원 엄선’ 원칙을 정했다. 우리말과 글, 그리고 외솔 선생에 대한 애착이 많은 분들을 그 중심에 두기로 했다. 병영 출신 김기환 전 시의원, 김태수 전 울산작가회의 회장(전 화진초등 교장)을 비롯해 교사·일반인 41명을 회원으로 영입했다.

외솔회가 ‘재단법인’으로 발족한 때는 1970년 8월 1일. 올해로 어언 마흔다섯 돌을 맞은 것이다. 현재 외솔 선생의 셋째 손자 최홍식 씨(세브란스병원, 의학박사)가 재단법인 외솔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초기에 전국 70개 시·도지부가 있었던 외솔회는 행정조직 개편과 더불어 겉모습이 적잖이 변했다. 이 회장은 전국 지역단위 모임 중에서도 연 1회 ‘한말글’을 펴내는 대전(한밭) 외솔회가 가장 활발한 편이라고 귀띔한다,

외솔기념관 도서·유품 李회장 발품 덕분

‘중구 병영12길 15번지’의 외솔기념관이 외솔생가와 함께 만천하에 존재를 알린 것은 한글날 564주년인 2010년 10월의 일이었다. ‘외솔 생가 복원 및 기념관 건립 추진위’가 발족(2002년 10월)된 지 8년 만의 경사였다. 그 당시 김 철 추진위원장(울산상의 직전회장), 박맹우 울산시장(현 국회의원), 조용수 중구청장 3인을 중심으로 재계와 관계 등 사회 각계 인사들의 하나 된 마음이 생가 복원과 기념관 개관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외솔기념관에 소장된 약 1만2천 권의 도서와 두루마기, 책상, 타자기 등 외솔 관련 유품은 이성태 회장 개인이 다년간 발품을 판 결과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 처음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외솔 선생의 손때 묻은 유품이나 유고집은 모두 서울 사는 외솔의 유족, 그리고 외솔회 사무국에다 빌다시피 요구해서 기증받은 것들이지요. 하지만 처음엔 못 믿겠다는 눈치입디다. 진심을 알아주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더군요.”

사비도 제법 털었다. 나중에는 ‘내가 유족들의 책사’인가,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여하간 외솔 관련 책자나 유품 어느 하나 이 회장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게 주변의 여론이다. ‘외솔의 길은 이성태로 통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 지난달 28일 오전 현대호텔에서 열린 '2015 국어책임관, 국어문화원 공동연수회'에서 특강을 하는 이성태 외솔회 울산회장.

생가 뒤란 ‘외솔내외무덤비’에 숨은 사연

외솔생가 뒤란에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는 엄청난 크기의 ‘외솔내외무덤비’에는 나름의 사연이 숨어 있다. 외솔 선생의 무덤과 이 무덤비는 처음 경기도 남양주의 양지바른 야산에 모셔져 있었다. 그러다가 2009년 9월 정부 조치에 따라 대전 국립현충원의 애국지사 제4묘역으로 무덤이 옮겨진다. 외톨이로 남은 이 내외무덤비는 유족들의 배려로 울산의 외솔생가 터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외솔 선생은 생전에 자신의 큰 스승인 한힌샘 주시경 선생의 묘역 가까이에 묻어 주기를 희망했다. 고인의 뜻에 따라 유족들은 경기도 파주에서 남양주 야산으로 옮겨온 주시경 선생의 묘역 가까이에 외솔의 무덤을 꾸몄다. 그런데 이 남양주의 야산은 외솔이 주시경 선생을 모시기 위해 자신의 돈으로 사들여 한글학회에 기증한 ‘한힌샘을 위한 선산’이었다. 외솔은 “내가 죽으면 스승님 곁에다 묻어 달라”고 할 정도로 주시경 선생을 따르고 존경했다고 한다.

방아쇠·가늠자·도시락…외솔이 지어낸 말

이성태 회장은 그의 큰 스승 외솔 선생의 뜻이라면 못할 것이 없다. 순우리말을 가다듬어 쓰고 일제의 잔재를 걷어내는 일도 그런 일의 하나다.

“그 어른은 국어에만 관심 가진 분이 아니었지요. 수학의 가감승제(加減乘除)를 순우리말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으로 바꾸어 부르게 한 분도 ‘겨레’란 낱말을 만들어낸 분도 외솔 선생이었지요.” 생물용어의 피돌기(혈액순환)와 김내기, 군사용어의 방아쇠와 가늠자도 다 외솔의 작품이고 일본말 ‘벤또’를 ‘도시락’으로 바꾸게 한 분도 외솔 선생이라고 했다.

“8·15 해방과 더불어 선생께서 출옥한 직후 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 자리를 스스로 원한 것도 다 우리말 사랑 때문이었다고 해요. 장관 같은 높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이 필요하다 싶은 일은 기어이 해내고 마는 그런 분이었답니다.”

그런 집념과 고집이 ‘영이와 철수’가 나오는 초등국어와 중등말본, 고등말본에 이르기까지 56가지나 되는 교과서 펴내는 원동력이 됐을 법하다.

“한글예술제를 ‘한글 큰잔치’로” 제안

그는 반문한다. “우리가 예사로 쓰는 축제(祝祭)라는 낱말, 일본의 마츠리(祭り=경사스러운 종교적 제사의식)란 말에서 따온 사실을 알고 난 마당에는 삼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한글주간을 맞아 10월 8일부터 사흘간 외솔기념관 일원에서 열리는 ‘한글예술제’에 대한 아쉬움도 없지 않다. 기념행사 이름을 한글도시답게 ‘한글 큰잔치’로 바꾸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또 일출(日出)은 ‘해돋이’로, 일몰(日沒)은 ‘해넘이’로 바꾸어 부르자고 한다. 시청 계단에서 볼 수 있는 ‘우측통행’이란 용어도 같은 값이면 ‘오른쪽 걷기’ 식으로 바꾸어 쓰자고 주장한다.

초등학교 교과서의 ‘한자 병기’라면 당연히 반대다. ‘한자 병기’ 소동은 한자 중독자들의 조급증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질책한다.

“외국어는 살아가기 위한 수단쯤으로 여겨야 하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우리말과 글부터 올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말과 우리글 속에는 우리 조상, 우리 겨레의 얼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학성고 1회 졸업…집안은 ‘16의사 가문’

경주 입실이 호적상 안태고향이지만 실제로 태어난 곳은 울산시 북구 호계동의 천곡마을이다. 외가가 모두 울산에서 살았다. 입실초, 외동중을 나왔고 HR(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설립한 학성고 제1회 졸업생이다. HR이 남긴 말은 좋은 추억의 편린으로 남아있다.

“HR이 정치적으로 욕 먹을지는 몰라도 울산교육의 관점에서는 큰 역할을 하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한 명이라도 좋으니 사람다운 사람으로 키워 달라’고 지역 유지들에게 부탁했다는 말은 아직도 쉬 지워지지 않습니다.”

최해도 전 남구 부구청장, 김덕균 전 울산문화원 사무국장, 김정성 전 울산시 도시국장, 박대식 전 현대차 제5공장장, 우수룡 전 강남교육장이 동기동창이다.

진주교대를 기점으로 동아대 상경대학 경영학과, 동아대 경영대학원(국제회계학 전공-경영학석사)을 두루 거쳤다. 경영지도사 자격증을 가졌고 ISO 심사위원과정을 수료했다.

청안이씨(淸安李氏) 명문가 집안 태생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 창의’의 공적으로 충의사 등지에 위패가 모셔진 선대 할아버지가 울산, 경주를 합쳐 16위나 된다. 그러기에 울산에선 ‘16의사 가문’으로 통한다. 개운포전투에 참전했던 이응춘 14대 선조가 아들에게 보낸 한문편지는 지금도 울산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지금 충의사에 모셔져 있는 이 눌(李訥) 선무원종 1등 공신도 13대 선조다.

글·사진=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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