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쉼표
일상의 쉼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8.17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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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의 글을 읽다보면 그의 간결한 문체에 마음이 빠져든다.

어떤 내용이든 우선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고 호흡이 편해져 부담이 적다.

그것은 어쩌면 쉼표의 경지를 넘어선 마침표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자전거여행>에서 보면 그 자신도 얼마나 쉼표를 그리워하는지 역력하다.

글을 쓸 때 어떤 경우 뜻전달을 놓칠까봐 마음이 앞서 문장이 길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그 글은 산만해지고 복잡하게 꼬여서 오히려 뜻전달이 더 어려워지고 의미가 퇴색되기도 한다.

그럴 때 궁여지책으로 어디쯤 쉼표를 찍어본다. 완벽한 문장은 아니지만 한결 나아져 뜻전달도 호흡도 수월해진다. 우리 삶도 일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얼마 전 저녁을 먹고 같은 아파트단지에 사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서로 바쁜 탓에 가까이 있어도 좀체 시간을 내기 어려워 언제 만났는지 기억도 없었다.

아파트 담장 밑에서 친구는 벌써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동네 골목길을 약속이라도 한 듯 걷기 시작했다.

저녁 어스름이 좋았다. 어느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더러 지나다니기도 했던 골목에 어느 새 예쁜 찻집 하나가 들어서 있었다.

“어머 예쁜 찻집이네. 들어가 볼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찻집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질감 좋은 나무로 꾸민 실내 인테리어에 멋진 바리스타 그리고 환상적인 커피향에 적당한 조명, 북유럽풍 의자와 탁자…… 딱 우리가 원하는 스타일이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책을 보는 한 사람 외엔 아무도 없었다. 저녁 무렵 동네 찻집은 한산하고 여유로웠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포즈로 차를 마시며 자식이야기, 남편이야기, 여행이야기, 친구이야기 등으로 수다에 몰입했다. 간간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도 수다에 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어느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는 미래의 시간에 대한 보장은 현재를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우리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으니까.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 쉼표를 찍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새 시간이 한밤으로 치닫는 것도 잊은 채……

찻집 주인의 눈치는 없었지만 우리가 즐기는 지금 이 시간이 그에겐 또 다른 일상일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찻집을 나왔다.

여름밤의 낭만이 밤공기에 가득했다. 무언지 모르지만 잃어버린 기억과 시간을 되찾은 듯 스무 살의 아련함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대개는 그 시간이면 무심히 저녁을 먹고 집안 뒷정리가 끝나면 TV에 눈을 박다 잠자리에 들다보니 여름밤의 낭만을 잊은 지 오래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늘 같은 일상처럼 갔던 길을 되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먼 길로 돌아 훠이훠이 아주 느린 걸음으로 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아파트로 돌아왔다.

머리위에는 하현달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웃고 있었다. 문득 <월하정인>이라는 신윤복의 그림이 떠올랐다.

애틋한 연인은 아니지만 우리의 오랜 우정이 더 깊어지는 듯했다.

아직 직장을 가진 친구는 오랜만에 행복한 밤이었다고 말했다.

우리 마음이 달맞이꽃처럼 환해져 있었다.

<이정미 수필가·나래문학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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