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한 방울 안 나온다는 건 옛날 얘기”
“석유 한 방울 안 나온다는 건 옛날 얘기”
  • 김정주 기자
  • 승인 2015.07.07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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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규 한국석유공사 사장
▲ 우리나라 최초의 유전 '동해-1 가스전'에서 생산한 원유에 대해 설명하는 서문규 한국석유공사 사장. 정동석 기자

울산혁신도시로 이전한 한국석유공사 본사. 방문 절차가 생각보다 까다롭다. 휴대전화에 ‘촬영 금지’ 딱지를 붙여야 입장이 허용된다. 국가 보안시설이니 그렇겠지. 방문객들도 금세 순응하는 모습들이다.

23층 건물 맨 꼭대기 층이 사장실이다. 마주보는 회의실 겸 응접실이 꽤나 넓어 보인다. 건물 내 840명 대식구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서문규(62) 사장. 온화한 미소가 오래 우정을 나눈 친구 같다.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 울산의 도심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창가로 먼저 안내한다. “내방객이 오시면 탁 트인 전망을 자랑삼아 보여드리곤 하죠.” 하지만 그도 얼마 동안뿐이라고 아쉬워한다. 바로 앞 빈터에 머잖아 60층이 넘는다는 D개발과 20몇 층은 될 거라는 S백화점이 전망을 가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석유공사와 함께한 생사고락 36년

약 3년 전 현직에 취임했지만 1979년 3월 기획실 근무부터 시작한 ‘창설 멤버’이니 누가 뭐래도 한국석유공사의 산 증인이다. 만 36년 3개월이 넘게 오로지 ‘석유공사’ 한 우물만 팠다.

다음 달 정년을 맞으면 사장 취임 시기에 같이 맡았던 ‘세계석유회의 한국위원회 회장’, ‘해외자원개발협회 회장’ 직함도 내려놓아야겠지만 ‘자리’보다 ‘친정’에 대한 향수를 어찌할거나. 그는 잠시 회사 창립 당시의 기억을 더듬는다.

“초대 사장님은 외무부장관 지내신 김동조 어른이었지요.” 김동조 전 장관이라면 정몽준 전 국회의원의 부인 김영명 여사의 부친이다. “힘 있는 분이셨고, 세계적인 석유회사를 만들겠다고 포부가 대단하셨답니다.”

한국석유공사의 출범(1979. 3)은 시기적으로 보더라도 이란의 석유 수출 정지(1978. 12. 26-1979. 3. 5)에 기인한 제2차 오일쇼크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세계적 석유파동을 겪은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원유 비축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80년대 초부터 석유공사를 앞세워 전국 9곳에 비축기지(저장시설)를 건설하고 원유 1억4천600만 배럴 분량의 비축 능력을 갖춘다.

석유공사는 울산, 거제, 여수, 서산, 평택, 구리, 용인, 곡성, 동해 등 국내 9개 비축기지에 비축지사를 두고 있다. 또 캐나다, 미국, 영국, 카자흐스탄, 이라크, 아부다비, 베트남, 두바이 등 국외 8곳에는 주재원이 지키는 해외사무소를 두고 있다.

-비축기지 확보 자신감… 해외개발에 눈길

자신감이 붙은 석유공사가 2단계로 눈길을 돌린 것은 해외자원의 개발이었다. “베트남 15-1 광구가 시야에 잡혔어요. 1994년 8월 베트남 정부의 광구 분양 정보를 입수하고 한국의 SK, 미국의 코노코와 그룹을 만들어 광구 평가에 들어갔고 유망성이 매우 높다는 판단이 섰지요.”

석유공사는 그 해 10월 베트남 정부에 입찰서를 제출한다. 1997년 1월의 입찰에서 엑손모빌, 쉐브론 등 세계 메이저급 석유회사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25년간의 광권(鑛權)을 차지한 석유공사는 마침내 2003년 10월 처음으로 베트남 15-1광구 내 ‘Sutu Den 구조’에서 상업생산을 개시한다.

이후 ‘베트남 15-1 광구’는 ‘베트남 12-1 광구’ 및 울산 앞바다(울산 동남쪽 58km 해상) ‘동해-1 가스전’과 함께 석유공사 자원개발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기록에 남게 된다.

“베트남 15-1 광구는 석유 메이저들이 죄다 포기한 광구인데 우리가 우리 기술력으로 구조를 새롭게 해석해서 빛을 본 경우이기에 감회가 정말 남다릅니다.” 서 사장의 눈빛은 세계 굴지의 메이저들을 보기 좋게 따돌리고 드디어 우리가 해냈다는 자부심 탓인지 윤기가 더욱 진한 듯했다.

-동해-1 가스전, 매일 車 2만대 휘발유도 생산

문득 울산 동남쪽 58km 해상에서 양질의 천연가스를 11년째 내뿜고 있는 ‘동해-1 가스전’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순간 서 사장의 얼굴에 화색이 피어났다.

“2004년부터 생산이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유전 아닙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생산되는 원유가운데 천연가스가 90% 정도이고 나머지 10%는 몽땅 원유랍니다.”

놀랍고도 반가운 소식이다. 천연가스만 나오는 줄 알았던 동해-1 가스전에서 ‘콘덴세이트(condensate)’라 불리는 양질의 원유가 섞여 나온다니! 대기오염물질이 거의 없는 콘덴세이트는 용도가 매우 다양하다. 정유공장에서는 다른 원유에 섞어 정제하기도 한다.

무색투명하고 휘발유의 성상이 강한 초경질 원유 ‘콘덴세이트’가 매일같이 생산된다는 것은 아주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대한민국을 ‘세계 95번째 산유국’ 대열에 올려놓은 동시에 우리의 기술력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석유공사 자료에 따르면 동해-1 가스전에서는 하루 평균 5천만 ㎥의 천연가스와 1천 배럴의 원유가 나온다. 천연가스는 하루 34만 가구에 공급할 수 있는 양이고 휘발유 상태의 원유는 자동차 2만대를 운행할 수 있는 양이다. 특히 울산앞바다 동해-1 가스전은 약 17억 5천만 달러의 수입대체 효과와 3만5천 명의 고용창출, 2조 원의 부가가치를 가져다주는 한국경제의 효자로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서문규 사장은 천연가스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전량 한국석유공사 저장시설로, 그리고 원유는 전량 S-OIL 저장시설로 공급된다고 했다. 동해-1 가스전이 그동안 벌어들인 돈만 2조 2천억 원어치. 그러면서 그는 힘주어 말한다. “대한민국에 석유 한 방울 안 나온다는 것, 이젠 옛날얘기입니다.”

희소식이 더 있었다. 동해-1 가스전 남쪽에서는 오는 10월쯤 대우인터내셔널이, 북쪽에서는 내년 초쯤 호주 우드사이드가 각각 새로운 시추에 들어갈 계획이라는 것. 두 곳 모두 60km쯤 떨어진 해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 울산 동남쪽 5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동해-1 가스전 전경.

-‘영일만 석유’ 특종 조갑제 기자와의 인연

석유 시추 이야기 도중에 화제는 1970년대 중반 무렵 포항 영일만에서 석유가 발견됐다는 탐사보도로 전국을 놀라게 한 조갑제 기자(당시 국제신문 소속) 이야기로 옮겨 갔다. 조 기자는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있기 전에 특종을 터뜨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6년 1월 15일자 경향신문은 ‘영일서 양질의 석유 발견’이란 제목의 1면 기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기자회견 내용을 실었다. 박 전 대통령은 “작년 말, 12월 초로 기억되는데 포항 영일만 부근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된 것은 사실이다. 우리 기술진이 오랜 탐사와 시추를 해본 결과 서너 개 공(孔) 중 한 군데서 가스와 석유가 발견됐다. 물론 나온 건 소량으로 몇 드럼 정도인데 KIST에서 분석한 결과 질이 매우 좋은 석유로 판명이 됐다”고 밝혔다.

이후 KIST에서 분석한 결과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이를 두고 ‘신기루처럼 왔다 간 산유국의 꿈’이란 말이 나돌기도 했다. 석유공사 설립 이전에 산유국의 꿈에 부풀어 있던 시절의 해프닝이었다.

이 대목에서 서 사장이 말문을 열었다. “북한에서도 한때 서해 앞바다에 기름이 나온다 해서 기대가 컸던 모양이지만 역시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 적이 있었다고 해요.” 조갑제 기자에 대한 기억도 떠올렸다. “1980년대 석유공사가 서울 무교동 코오롱빌딩에 있을 때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석유 공부를 엄청나게 하는 것을 보았어요. 대단히 훌륭한 분으로 각인되어 있지요.”

-보성고 동기 ‘울총 3인’, 소주로 회포 풀기도

모교인 서울 보성고등학교는 뿌리가 깊다. 이용익(李容翊) 선생이 교육구국(敎育救國)의 일념으로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에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개교 109돌, 내년이면 110주년이 된다. 대학교는 뿌리가 같은 고려대학교(보성전문학교 후신) 불어불문학과 출신이고 중학교도 보성중학교를 나왔으니 골수 보성인(普成人)인 셈이다.

“중학생 때 배지를 달고 전철을 타면 할아버지뻘 되시는데 ‘내가 자네 선배야’ 하시는 분들을 자주 보았지요.” 그 때마다 남모를 자부심을 느끼곤 했었다.

울산에서 만난 고교 동기생 3명은 요즘 가끔씩 어울려 소주잔을 주고받는다. 울산 혁신도시의 본사 사무실로 지난해 11월 16일인가 이사 왔으니 신광섭 울산박물관장보다는 울산 입성이 하루 먼저다. “하루 볕이 어딘데?” 둘 사이에는 허물이 없고 서로 만만하게 여긴다. 지난해 초 부임해 ‘울총(울산 총각)’ 고참인 뉴포텍 임채문 사장도 고등학교 동기다.

고교 동기생이 그래서 좋다. 누가 공부를 더 잘했느냐는 쉬어 가는 질문에 서 사장은 싱긋 웃는다. “당연히 제가 잘했지요.” 보성고는 목표로 삼는 대학교에 따라 1반, 2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서 사장은 공부 더 잘하는 2반에 속했노라 너스레를 떤다. 신 관장은 허허 웃으며 양보지심을 발휘한다.

-정년퇴임 후 울산이 좋아 울산 살기로 결심

서문규 사장은 울산이 좋다. 태화강변이 좋고 영남알프스 7봉이 다 좋다. “처음엔 울산이란 도시가 멀고 공기도 안 좋을 거라는 서입견이 있었지만 막상 와 보니 서울보다 공기가 더 좋습디다. 친구한테 회사 그만두는 한이 있어도 울산 안 떠난다고 말한 적도 있어요.”

울산 거주 쪽으로 가닥을 잡은 이유는 또 있다. 36년간 생사고락을 같이한 직장 동료, 그리고 후배들과 같이 울산에서 부대끼며 살고 싶은 욕망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솔가해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울산에서 구하는 것은 아직 별개의 문제다. 부임 직후 보름 남짓 울산서 살림을 하다가 단념한 부인을 다시 설득하는 문제가 남아있는 것이다. “말동무가 없다 보니 외로움이 컸던 모양이지요.”

며칠 전 혁신도시와 KTX 울산역을 오가는 리무진 버스 기사들이 회사 앞에서 피켓시위를 한 일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통근버스를 대절하는 일이 곧 사라지기를 바라지만 정부와 노조의 목소리도 외면할 수 없는 사안이다. 따지고 보면 노조가 목소리를 내는 것은 혁신도시를 중심으로 한 울산의 정주여건과도 맞물려 있다.

하지만 지혜롭게 해결될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자신도 예비 울산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깊이 고민해 볼 참이다.

글=김정주 논설실장·사진= 정동석 기자·울산석유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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