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장에 대한 기억
백사장에 대한 기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6.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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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 성 가진 사장’ 이야기가 아니다. 여름 피서 철이면 좋으나 싫으나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해수욕장 모래사장의 이야기다.

고향 부산에는 탐스런 모래로 뒤덮인 해수욕장이 유달리 많았다. 동쪽으론 옆 동네 광안리 해수욕장부터 버스 타고 몇 정거장 더 가면 만나는 해운대 해수욕장, 그리고 동해안 소금기가 느껴지는 송정 해수욕장에다 늘 교통문제가 골칫거리이던 일광 해수욕장도 있었다. 서쪽으론 국내 최초로 다이빙대와 더불어 개장(開場)했다는 송도 해수욕장, 물살 세기로 유명한 다대포 해수욕장이 있었다.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진 해수욕장도 있었다. 왜정시대 때 일본인 피서객들로 북적거렸다는 옛 수비(水飛=수영비행장) 앞 백사장, 6·25전쟁 때 ‘서전(瑞典=스웨덴) 적십자병원’과 ‘이승만 별장’이 있었던 옛 수대(水大=수산대학교, 남구 대연동) 옆 백사장이 바로 그런 곳이다.

좌우 이웃동네 바다가 모두 천혜의 피서지였던 필자로서는 광활한 느낌의 광안리보다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수대 옆 백사장을 더 즐겨 찾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어릴 적 수대 바로 앞 백사장은 치패(稚貝) 양식장을 겸해 ‘출입금지’ 팻말이 늘 발목을 잡았지만 철조망 바깥 백사장은 전혀 사정이 달랐다. ‘자유해방구’ 같은 곳이어서 호미나 맛살만 있으면 대합조개, ‘마치(=맛)’ 따위는 맘 내키는 대로 잡을 수 있었다.

내친김에 이름 없던 백사장 이야기를 하나 꺼내놓지 않을 수 없다. 이 무명(無名)의 백사장은 ‘영도 아치섬’ 속의 해양대학교와 동삼동 육지부를 이어주던 연육교(連陸橋)와 유관하다. 해양대 서쪽 건너편 절벽 아래에 생겨난 이 백사장은 그 전까지만 해도 좁다란 자갈마당에 지나지 않았다. 물길을 따로 내지 않은 연육교가 바닷물의 흐름을 철저히 가로막으면서 모래와 뻘을 실어 나르던 조류(潮流)에 서서히 변화가 생겼고, 급기야 자갈마당이 모래사장으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인위적 지형변화의 생생한 흔적이었던 이 백사장은 한동안 애물단지였으나 지자체와 업자가 배짱을 맞춘 후로는 산업용지로 둔갑하고 만다.

무명의 백사장에 대한 기억을 굳이 떠올리는 것은, 뼈저린 체험을 통해 얻은 값진 교훈을 울산지역 지자체들이 쉽사리 망각해 버리는 건 아닌지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해마다 개장 시기가 다가오면 해수욕장을 안고 있는 지자체들은 수천만 원 혹은 수억 원을 들여 ‘모래성 쌓기’에 바쁘다. 조류에 휩쓸려 사라진 백사장 모래를 도로 채워 넣겠다는 일념에서인 것은 어린아이도 안다.

지난 26일 개장식을 가진 동구 일산 해수욕장의 대왕암공원 쪽 백사장에는 돈을 들여 쌓아놓은 ‘모래 피라미드’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지역 토박이 P씨는 “바닷가로 모래 대신 자갈들이 몰려나온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필시 ‘고늘 지구’에 파도막이 겸 선박보호 용으로 두 군데나 설치해둔 ‘테트라포트 방파제’가 말썽의 주범이지 싶은데도 아직 그 원인을 못 찾고 있다니 한심스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울주군 진하 해수욕장은 그 고민이 더하다는 소리가 들린다. 회야강 하류에 명선교를 건설한 이후 나타난 예기치 못한 현상 때문에 조사용역까지 마쳤지만 또 다른 고민이 머리를 아프게 하는 모양이다. 140억 원이나 들어가는 예산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니 ‘부자(富者) 자치군’ 소리가 무색할 지경이다.

“내 탓은 아니요”라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과학을 도외시한 ‘치적(治積) 치레’가 얼마나 엄청난 역기능을 가져오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 볼 일이다.

지나친 인위(人爲)가 자연생태계에 얼마나 몹쓸 해악을 끼치는지? 이는 과학이 입증하는 불변의 교훈일 것이다.

<김정주 논설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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