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그리고 유비무환
가뭄 그리고 유비무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6.24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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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맞추어 비가 알맞게 내리며 바람이 고르게 불어 농사에 도움 되는 순조로운 기후를 우풍순조(雨風順調)라 부른다. 그로 인한 태평성대는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바라는 이상향의 세상이다. 신라 제49대 헌강왕 재위 시 그러하였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올해 가뭄은 지난 40년간 사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다고 한다. 저수지가 바닥을 보인다고 하니 앞으로 식수난 생각에 걱정이 앞선다. 매일 균열된 논바닥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현장을 찾는 지도자의 마음도 걱정은 한가지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미리미리 평소에 준비하여 근심이 없기를 바라는 유비무환의 고사를 다시 한 번 새기고자 한다.

가뭄의 피해는 현실의 어려움도 크지만 그로 인해 예상하지 못한 일이 수년 동안 지속된다는 점에서 소홀히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가뭄은 모든 생명체를 말라죽게 한다. 그로 인해 연쇄적인 영향을 미치며 결국 먹이나 음식의 고갈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하게 된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아니 할 놈 없다’, ‘사흘 굶은 범이 원님 안다더냐’, 사흘 굶은 개는 몽둥이를 맞아도 좋다고 한다’… 이들 속담의 공통적 방점도 가뭄과 연관된 굶주림에 있다.

‘가난이 창문 열고 들어오면 사랑은 대문 열고 나간다’, ‘인심 나던 곳간도 텅 비면 지킴이도 떠난다’는 등의 속담도 음식과 연관이 있다. ‘밥은 동쪽 집에서 먹고 잠은 서쪽 집에 가서 자면 안 되겠느냐고’ 시집갈 처녀가 당돌하게 매파에게 말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의 옛이야기도 사랑과 밥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보아 넘길 수 없다는 말이다. 의식주라(衣食住)고 말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곱다’ 등의 속담으로 미루어볼 때 그 순서는 식주의(食住衣)가 맞을 것 같다.

42년 전 배고픔의 경험이다. 일병으로 자대에 배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역에 차출되었다. 일이 늦게 끝나 저녁 배식이 한참 지난 뒤에 내무반에 도착했다. 배식 담당이 실수였는지 밥을 챙겨놓지 않았다. 그날 일병의 위치에서 배고픔의 서러움에 밤새 잠은커녕 소리 죽여 울었다.

쥐도 사랑보다 배고픔의 해결이 우선이다. 실험실에서 열흘 정도 굶긴 수컷 쥐 한 마리에게 발정한 암컷 쥐와 먹이를 준비해 두고 케이지를 열었다. 먼저 암컷 쥐에게 다가가더니 몇 번 냄새를 맡고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먹이를 먹었다.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다.

가뭄은 코끼리와 두루미가 집단으로 이동하는 행동을 부추긴다. 코끼리가 가뭄으로 민가를 습격했다. 중국 윈난성의 야생 코끼리 20마리가 가뭄으로 먹이가 고갈되자 인근으로 내려와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농작물에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숲에 있어야할 코끼리가 배고픔과 굶주림에 오죽 시달렸으면 죽음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마을로 내려왔을까.

주민들은 바라만 보았을 뿐 쫓지 않았다고 하니 다행이다.

두루미도 먹이를 찾아 떠난다. 러시아, 중국 등지의 습지에서 봄철에 번식한 두루미는 겨울철에는 유조(幼鳥)와 함께 땅과 물이 얼지 않고 낙곡(落穀) 등 먹이가 풍부한 지역으로 날아간다. 잠자리, 먹이, 습지 등 월동지의 생태환경이 건강하면 매년 찾게 된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월동지가 함경남도 안변과 강원도 철원이다. 그 외 함경남도 금야, 평안남도 문덕, 황해남도 강령도 있다.

강원도 철원지역에서 두루미가 월동을 시작한 것은 1998년 20마리부터라고 한다. 그런데 2013년도부터 매년 1천 마리로 불어나 월동하고 있다. 국제두루미보호재단 조지 아치볼드 이사장은 이러한 현상을 북한에서 월동하던 두루미가 가뭄으로 먹이가 고갈되자 철원으로 날아오게 된 ‘엑소더스(exodus) 현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변과 철원은 직선거리로 80㎞ 정도다. 어디 두루미만 집단 탈출하고 사람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가뭄은 모든 생명체에 고통을 줄 뿐 아니라 생존마저 위협한다. 지구온난화는 비가 많이 오고 가뭄이 드는 등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 중심에 화석연료의 과다사용과 무분별한 산림훼손이 있다고 한다. 모두 사람이 오랜 시간 답습한 것들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가뭄을 ‘구한(久旱)’으로 적고 있으며 모두 224번을 찾을 수 있다.

구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인 기우제 또한 1천461건을 찾을 수 있다. 조선 태조 3년(1394) 5월 8일자 첫 번째 기록에는 “가뭄으로 절과 신사에 기우제를 지내고, 시장을 옮기다”라고 적었다.

가뭄이 더 이상 지속되면 경남무형문화재 제19호 가야진용신제가 행사가 아닌 의식으로서 국민의 정서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할 것도 기대해 본다.

울산에도 처용암, 무룡산, 용금소, 백룡담, 구수소 등지에는 용이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1937년 오랜 가뭄으로 병영성 안의 시장이 동천으로 옮긴 이시(移市) 사례도 있었다. 미리미리 준비해두지 않았기에 용에게 빌어서라도 가뭄을 해결하려고 했던 민속의 흔적이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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