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과 6·25전쟁
호국보훈의 달과 6·25전쟁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6.16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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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인 6월도 절반이 훌쩍 지났다. 호국보훈의 달은 현충일, 6·25 한국전쟁, 6·29 제2연평해전이 모두 일어난 6월을 기념하기 위해 국가보훈처에서 지정하였다. 이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며, 국민의 호국·보훈의식 및 애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에서의 6월은 유난히도 많은 아픔과 시대적 흐름에 상처를 받은 질곡의 시기였으며, 자랑스럽지 못한 호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 시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보면 6월 1일인데 이 날이 곧 ‘의병의 날’이다. 이와 같이 호국보훈의 달은 의미가 있는 날로부터 시작되었다.

1906년 6월 4일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을사조약(늑약) 체결에 분노해 최익현 선생의 의병봉기가 이뤄진 날이고, 1920년 6월 7일에는 만주에서 홍범도 장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 추격대를 궤멸시킨 ‘봉오동전투’가 벌어진 날이며, 1914년 6월 10일은 하와이에서 박용만의 주도하에 대조선국민군단이 조직된 날이다.

또한 1926년 6월 10일에는 조선의 마지막 국왕인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해 대규모의 6·10만세 독립운동이 벌어져 1천여 명이 체포되거나 투옥되기도 했으며, 1907년 6월 15일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이준 열사가 순국한 날이며, 1921년 6월 21일에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군 대부분이 사상당하는 ‘자유시참변’이 발생한 날이다.

조국 광복 이후에도 6월의 민족적 수난은 멈추지 않았는데, 남북한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생하였으며, 6·25전쟁 후 전사자를 추모하고 기념하려는 의도에서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지정해 공휴일로 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6월은 가슴이 미어지는 달이다. 한편으로는 가슴이 뿌듯한 달이기도 하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과 장병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와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의미가 있는 일이다.

오늘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선열들이 조국을 지켜낸 의로운 삶이 있어 가능했기에 그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언어와 단어는 시대와 가치에 따라 변한다. 우리 민족이 서로 싸운 슬픈 전쟁인 6·25전쟁을 과거에는 ‘6·25동란’과 ‘6·25사변’으로 불렀던 것도 마찬가지다. 6·25전쟁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남한과 북한이 싸운 전쟁으로 미국, 소련, 중국도 이 전쟁에 참여했으며 다른 이름으로 ‘한국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전쟁 직후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컸던 시기에 우리는 6·25를 북한에 의한 반란을 뜻하는 ‘동란’과 ‘사변’으로 불렀다. ‘6·25동란’이나 ‘6·25사변’은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그대로 녹아있는 표현으로 ‘6·25전쟁’이라는 단어가 익숙한 요즘 세대들에겐 낯선 단어다.

이러는 사이 6·25전쟁을 지칭하는 용어는 ‘6·25동란’→‘6·25사변’→‘6·25남침’→‘6·25전쟁’ 등으로 3차례 바뀌었다. 그리고 현재 6·25를 지칭하는 공식용어는 ‘6·25전쟁’으로 자리 잡았다. 남한의 북한에 대한 적대감도 점차 희석되는 등 시대·가치의 변화가 6·25에 대한 표현에도 반영된 셈이다.

하지만 6월은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시대·가치관의 변화도 좋지만 일부 정치권에서 주장하는 왜곡된 6·25전쟁의 역사관은 시정되어야만 한다.

<신영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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