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채염전에 날아온 두루미
마채염전에 날아온 두루미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6.02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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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부(鹽夫)라면 무척 좋아라 할 불볕더위의 기세가 6월이 되면서 날로 드세어진다. ‘울산소금’ 하면 한 시절 전국에서 꽤 이름이 났었다.

마산을 ‘합포’라 불렀듯이 울산을 ‘염포’라고 지칭한 이유가 있었다. 명촌 대도섬 염전, 돋질 조개섬 염전, 염포 소금포, 삼산 염전, 장생포 고사염분개, 부곡 염분개, 마채 염전, 서생포 염분개 등 백색의 소금도시라 할 만큼 유달리 염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마채염전’ 하면 염전에 종사한 염부는 금방 알아차리겠지만 무관심한 일반사람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해를 돕자면, 여러 염전 중에서도 ‘마채 염전’은 소금밭 모양이 마치 말채찍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두왕천과 청량천 두 샛강 사이에 있는 삼각주가 바로 마채 염전이야. 길쭉하게 생긴 것이 흡사 말채찍 모양 같았지…”라고 한 퇴역 염부 차동근의 구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왕천과 청량천이 만나 이루어진(合水된) 강이 외황강(外隍江)이다. 강 하류인 오대·오천 주변은 갈대밭이 들어선 넓은 습지였다. 건강한 습지에는 당연히 다양한 물새가 찾아들게 마련이다. 물새 중의 으뜸은 단연 두루미였다. 1950년대쯤 두루미가 마채 염전에 날아들었다. 울산은 건강한 습지생태 덕분에 역사 속에서 두루미와 공존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신라시대 계변성(戒邊城)으로 불리던 울산이 그 이름을 신학성(神鶴城)으로 고쳐 부르던 때가 있었다. 이는 한 쌍의 두루미가 신두산(神頭山)에서 울었다는 이야기에서 연유한다. 계변성의 건강한 자연생태를 이 대목에서 읽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두루미를 사육하여 ‘학계(鶴契)’로까지 발전하였다. 학계는 세속을 등지고 사는 선비들끼리 두루미를 한 마리씩 길러 누구 두루미 볏이 더 고운가, 누구 두루미 울음소리가 더 멀리 떨치는가, 누구 두루미 눈이 밝아 더 멀리 보는가 등 열 가지를 겨루는 콘테스트를 하였다고 하니 고상한 여가 이용이 아닐 수 없다.

반면 두루미는 사냥감이 되기도 하였다. 두루미를 사냥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전한다. ‘대산오류성중’ 조에 기록된 두루미 사냥 부분을 잠시 간추리려 보자. 끼니때마다 고기반찬이 없으면 밥을 먹지 않는 노모를 위하여 효행이 지극한 신효거사는 밭에서 먹이를 찾는 다섯 마리의 학을 발견하고 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화살은 비껴가면서 깃털 하나만 남겼다는 이야기다.

“우리 아버지가 소금꾼이었지요. 나는 어릴 때 고향 상개에서 염전이 있는 하개까지 3㎞를 소 몰고 다녔어요. 아버지가 소작하는 염전에 소를 넘겨주고 염밭 도랑에서 꼬시래기를 잡고 놀았습니다.……한 번은 삽을 들고 소금밭을 나가시던 아버지가 돌팔매질로 두루미를 잡았어요. 내 키만한 두루미를 어깨에 지고 오는데, 두루미를 잡은 아버지가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답니다.”

울산대학교를 정년퇴임한 양명학 교수의 구술에서 마채 염전에 두루미가 날아들었음을 알 수 있다. 1954년에 청량·범서 등지에서 두루미가 관찰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로 여겨진다. 또한 두루미가 염전에 날아온 이유 중의 하나는 염밭 도랑에 있는 꼬시래기도 한몫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현재 흔적뿐인 온산습지는 ‘회학(回鶴)’이라는 마을 지명에서 두루미의 자취를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더 분명한 것은 ‘두루미의 고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울산의 옛 지명이 ‘학성(鶴城)’이라는 사실이다.

고려시대 야운 스님은〈자경문(自警文)〉에서 수행자의 일상을 “풀뿌리와 나무열매로 주린 배를 달래고, 소나무 껍질과 풀 옷으로 이 몸을 가리며, 들판의 두루미와 푸른 하늘의 구름을 벗 삼고, 높은 봉우리 깊은 골짜기에서 남은 세월 보내는 것(菜根木果慰飢腸 松落草衣遮色身 野鶴靑雲爲伴侶 高岑幽谷度殘年)”이라고 소개하였다. 이러한 수행자의 도량인 승가도 이제는 시의를 좇아 창조경제의 요람으로 변모하고 있다.

지난달 22일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 서운암에서 두루미 4마리를 케이지(Cage)에 들이는 사육 행사를 가졌다. 목적은 ‘통도사학춤’의 활성화 방안을 찾는 데 있었다. 그 이후 두루미를 찾는 방문객이 갈수록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렇다면 ‘두루미의 고장’인 학성이자 ‘울산학춤’이 전승되고 있는 울산은 두루미(鶴)를 어떻게 대접하여 왔는가. 태화강 생태관광의 활성화로 지역경제가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는가. 산업만이 창조경제라는 착각을 아직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울산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문화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관심을 갖고 투자하고 실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입으로 시장 보면 상다리가 부러진다’는 속담이 있다. 모험적 실천에 앞장서던 젊은이도 나이가 들면 현실에 안주하기 심상이다. 그런데 창조경제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안주로는 결코 실현할 수 없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은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다.” 이 복음(마태 7:7)을 ‘창조’와 ‘실천’을 강조한 말로 받아들이고 싶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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