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조형물을 보며 29 그리스수학보다 신라수학의 첨성대②
신라조형물을 보며 29 그리스수학보다 신라수학의 첨성대②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8.17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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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까지 3회에 걸쳐 고대그리스 헬레니즘의 조각경향이 인도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중국은 물론 신라, 고구려, 백제 3국과 일본에 영향을 준 개요를 서술했다. 그 맥락에서 첨성대에도 그리스 기하학의 영향설(說)을 인용하면

▶ 첨성대는 높이와 밑의 정사각형 1변 길이의 비율은 5 : 4이고, 또 하부 원과 상부 원의 지름 비율은 5 : 3으로 되어있다. 이 수치는 각각 피타고라스정리에서 나타나는 직각삼각형의 cos-sin의 값이다. 첨성대 높이와 상하지름의 비율이 5 : 4와 5 : 3인 것은 이미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알고 있었고, 이용했다는 증거이다.

물론 다른 것에도 이 정리의 이용은 자주 나타난다. 그 중 잘 알려진 아름다운 건조물인 다보탑은 1 : 2 : 4 : 8의 등비급수를 이용하여 건조되었다. 또한 불국사와 석굴암도 피타고라스학파가 무리수임에도 자랑스럽게 그들의 상징으로 삼았던 황금비율로 건축했다.◀

라는 주장이 여과 없이 통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피타고라스학파 의 황금비율개념이 신라구조물의 조형원리라는 주장에 동감할 수만은 없다.

BC. 450년경의 황금비례개념이 1000년 후 AD. 6C 중엽 극동의 신라에 구축된 첨성대, 황룡사에 이용되었고, 통일 후 8C중엽 불국사와 석굴암, 성덕대왕신종 등의 조형원리로 이용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이 1 : 1.62의 황금비율 개념이 피타고라스학설과는 관계없이 신라 자생의 비례개념으로 보는 관점이다.

형태의 비율은 그리스에서만 인식한 것도 아니고 보면, 지구촌 어디에서나 이뤄지는 일상적 의식작용이다. 따리서 어느 지역의 민족이라도 형태형성에는 가장 완전한 이상성비율을 추구하여 왔고, 그렇게 지향한다. 그때마다 인정과 점차로 부정적인 형태추구가 발전적으로 변용(變容)하여 왔다. 황금비율도 이러한 과정 중에 인정된 비율개념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부인당하고 있다.

그런데 첨성대의 조형에 수학적 개념을 대입하는 것은 27열 362개 단위석재로 구축된 사실 때문에 천제관측소라는 가정이 수학성과의 연관을 전제했다고 보게 된다.

학설은 사실의 증명방법이다. 그러나 학지는 직접의 제작자가 아니 라, 자기관점에 의한 가설에 합리성을 주장하게 된다. 필자는 직접제작의 행위자이다. 따라서 제작목적에 부합하고자 내 모든 것을 집합하여 제작하게 되는 것이 모든 행위자의 속성이다. 홈런타자가 강속구를 수학적으로 계산해서 배트를 휘둘렀을 때는 백구가 이미 포수 글러브 속에 있어서 아웃의 주심외침을 듣는다.

첨성대조형의 비례는 감각에 근거한다. 수학적 계산으로는 근사성의조형체를 구할 수가 있으나 이상성의 조형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그리스의 이상성조형물을 본적도 없을 첨성대 설계자가 피타고라스학파의 황금비율 이용주장은 어설픈 가설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신라인에게 자체로 배양되어진 미감각과 그 수준이 근거했다는 관점이 타당하다고 본다.

문화의 영향, 교류는 물줄기와 같아서 낮은 곳으로 스며들기 마련이다. 그러하다면 왜 신라만이 황금비율을 이용했을까? 신라보다 먼저동시대이기도한 고구려나 백제의 구조물 비례는 피타고라스의 황금비적(的)도 아님은 물론이고 각각 다르다. 더더욱 다보탑, 석가탑은 백제지역의 아사달에 의한 조형물이고, 석굴암의 본존과 다(多)보살불상은 신라의 양지(良志)가 조각했다는 전설기록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이 두 조형인은 살아온 지역이 달라서 그 생활의식과 이에 의한 미의식도 같을 수가 없다. 또한 아사달은 탑(塔)조형을, 양지는 인체불상을 조각했다. 이처럼 서로의 제반조건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의 조형미는 황금비율의 수준이고 동질동감이다.

조각가인 아사달과 양지는 수학의 황금비율을 대입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자생된 신라미감(美感)과 그들 각자에게 용해된 고도수준의 조형감각에 의한 공통분모 즉 이상성을 향한 비례, 균형, 그리고 조화력에 의하여 다보, 석가탑과 석굴암본존불을 유일체로 창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수준의 조형물이 조성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수준이하의 조형도 많이 이뤄졌으나 이것들에게서는 황금비율적인 어떤 미감을 볼 수가 없다는 점은 개인의 수준차이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50여년 후, 제 38대 원성왕릉 괘릉의 문무석상과 수호석사자상에서도 이상수준의 맥락을 엿볼 수가 있는데 이 모두가 80년간 사이에 이뤄졌다

다시 말하면 황금비율의 확립은 고대부터 완전성을 향한 이상의 구현이며, 그리스만의 비례감각이 아니라 그 민족국가자체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되어진 문화수준의 공통성으로 본다면 그 해답은 분명해진다. 이들 조형물은 세계문화유산(World Heritage)에 등재되었다. <계속>

/ 이동호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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