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격려
아름다운 격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5.17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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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고향 울산을 다녀왔다. 모교(울산초등학교) 총동창회에서 주최한 ‘한마음 체육대회’ 참석 때문이었다. 서울에서의 바쁜 일정을 모두 접어 둔 채 큰마음 먹고 찾은 고향이었다. 고향 떠난 지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건만 명절이나 특별한 경조사 때 외에는 자주 찾을 수 없었던 고향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개교 108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행사였는데 ‘모교를 빛낸 108인’에 내가 선정되었다는 낭보(?)를 전해 들었던 터라 고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꽤나 들떠 있었다. 사실 그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무척 당혹스러워 주최 측에 수차례 고사(固辭)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그 뜻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설레는 마음을 달래가며 당일 행사장에 도착해 보니 분위기는 이미 한껏 무르익고 있었다. 특히 졸업한 뒤 처음으로 갖는 몇몇 친구들과의 만남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슴 벅찬 기쁨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무려 45년의 세월이 강물처럼 흐른 것이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정성껏 마련된 향토음식 주위에 둘러앉아 동심의 세계로 빠져든 동창들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이미 반백을 훌쩍 넘긴 초로(初老)들이었지만 마치 타임머신에라도 올라탄 듯 머나먼 추억 속의 여행에 잠겨 있었다. 특히 필자의 귀를 바짝 곤두세우게 한 대화는 옛 은사님에 대한 추억담이었다. 그중에서도 필자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고(故) 김영두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내가 서울에서 장충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봄날, 나는 공업도시 울산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울산초등학교 5학년 2반. 키 순서에 맞는 빈 자리가 없어 임시로 맨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내 짝은 학급에서 키가 제일 큰 여학생이었다. 담임선생님은 만능인이셨다. 남성미 넘치는 탄탄한 체격에 밝은 표정을 잃지 않으셨고 항상 긍정적인 생각이 담긴 가르침을 주셨다. 특히 음악시간에, 풍금 건반 위에서 선생님의 두 손이 어우러지면 아름다운 동요의 멜로디가 물결처럼 흘러넘쳤다. 만돌린 줄을 신나게 퉁기시면 경쾌한 행진곡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 전학한 지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선생님이 느닷없이 나에게 웅변대회 출전을 권유하셨다. 학교대표 선발이 예정된 시점이었다. 그러나 웅변이라고 하면 단연 이용익이라는 친구가 으뜸이라는 얘기를 이미 들었던 터라 선생님의 갑작스런 제의는 너무 뜻밖이었다. 자신이 전혀 없었던 나는 며칠을 망설이며 선생님의 눈치만 살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 선생님은 나를 조용히 부르시더니 “물론 용익이가 최고지. 하지만 열심히 연습하면 너도 잘 할 수 있을 거야. 일단 시작이라도 해보자”며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내성적이며 글짓기나 좋아했던 서울 소년은 그날 이후 전혀 엉뚱한(?) 분야인 웅변 연습에 매달려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큰 진전은 없었다. 줄줄 외우던 원고도 막상 선생님 앞에서 리허설을 시작하면 30초도 지나지 않아 머릿속이 하얘지곤 했다.

마침내 학급대표 선발의 날이 왔다. 하지만 그날의 승부는 예상했던 대로 나의 참패로 끝나고 용익이는 학교대표로 참가해 공업축제에서 1등을 차지했다. 같은 날 나는 백일장에 참가해 운문부 장원을 했다. 소질도 없는 웅변 때문에 당했던 창피스러움으로 그때는 선생님을 무척 원망도 했다. 하지만 너무 내성적이었던 제자를 좀 더 적극적인 경험의 장(場)으로 이끌어 자신감을 키워 주려 하셨던 깊은 뜻을, 이 시점에서 헤아려 보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선생님은 오래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나 자녀들은 선친의 뒤를 이어 고향 울산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하늘이 유난히 맑고 푸른 날은 선생님의 넓고 깊었던 사랑이 더욱 그립다. 그 ‘아름다운 격려’ 또한 잊을 수가 없다.

김부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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