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 할만네’ 이야기
‘영등 할만네’ 이야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5.11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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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태어나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는다. 나이는 거저 먹는 것이 아니다. 나이를 먹으울산지역에서 음력 2월에 선보이는 풍속 가운데 역사가 오랜 ‘영등신(盈騰神)’ 제의가 있다. ‘바람신’이라고도 부르는 영등신은 권상일이 편찬한 ‘학성지(1749)’에 처음 나타난다. ‘울산읍지(1934)’에는 영등제(盈騰祭), ‘흥려승람(1937)’에는 영동제(榮童祭)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식자의 관점에서 기록된 전적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일 뿐 결국은 동체이명(同體異名)이다.

기록과는 달리 서생면 나사리, 언양읍 대곡리, 웅촌면 은현리, 온양읍 운화리, 웅촌면 대복리, 서생면 나사리, 삼동면 하잠리, 서생면 신암리 등 현재 울주군지역에서는 ‘영등 할만네’라고 부른다. 영등신 풍속은 학성지 기록을 기점으로 볼 때 현재까지 267년간 지속되어온 풍속이다.

하지만 울산에서 이 풍속을 부각시킨 것은 4월 27일부터 12월 31일까지 8개월간 열리는 울주민속박물관(관장 변양섭)의 특별기획전이 처음이다. 울주군 등 12개 읍·면에서 전국 최초로 ‘영등 할만네’ 현지학술조사에 참여한 이필영 교수는 “영등 할만네는 과거의 울주 문화인 동시에 현재의 울주 문화”라고 강조한다.

울산 출신 민속학자 송석하는 1934년 ‘진단학보’의 ‘풍신고(風神考)’라는 논문에서 ‘풍신이라 함은 남한지방 일대에 전승하여 오는 구 2월 영동할머니와 이와 유사한 민속신앙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개념을 정리했다. 풍신은 영동할만네, 영동풍신, 영동할맘, 영동할마니, 영동할마시, 할마시, 영동바람, 풍신할만네, 영동마고할마니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린다는 사실도 소개했다. 이 또한 식자의 관점에서 정리되었다고 본다. ‘영등 할만네’ 의례는 기후학적으로 볼 때 초봄에 불어오는 계절풍 즉 ‘푄 현상(foehn phenomenon, 높새바람)’이 그 바탕을 이룬다. 민속적으로는 변덕스러운 할머니 바람신으로 의인화되었고 보편적으로 ‘영등 할만네’라고 부른다.

음력 2월에 한시적으로 치러지는 이 의례는 해마다 천복만복은 불러들이고 모든 재앙은 제거하는 ‘초복재제(招福災除)’ 혹은 ‘벽사진경(闢邪進慶)’의 민속신앙으로 전승되어오고 있다. 영등 할만네 민속은 목욕재계 후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소지 올리기에서 알 수 있듯이 2월 달 바람의 영향을 주로 받는 동해안지역에 분포되어 있고, 나라의 공동신이 아닌 개인숭배의 대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처음에는 초복재제 성격으로 시작된 의례가 나중에는 영등밥, 농사밥, 섬밥, 두지밥, 끄르미밥 등 농풍(農豊)과 어풍(魚豊)의 민속으로 변했다. 더 나아가 까마귀, 까치 등 날짐승까지 챙기는 조밥(鳥飯) 민속이 가미된 점은 그 영역이 조류와의 공존으로까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전술한 여러 가지 밥은 불가의 생반(生飯) 혹은 헌식(獻食), 유교의 물밥, 민속의 고시레(고수레)처럼 같은 의미의 다른 이름으로 나타난다.

또한 중심적 영가뿐 아니라 동참한 영가와 함께 음식을 나누어먹는 이중성도 엿볼 수 있다. 의례의 장소를 부엌이나 장독대를 선택하는 것 역시 가정의 안전을 위한 불조심과 배고픔, 반찬의 기본재료인 장류(醬類)를 관장하는 ‘조왕신’이 중심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곳간, 볏섬, 뒤주 등 벼 혹은 쌀을 보관하는 장소가 중심이 되는 만큼 의식주 중에서도 먹는 것이 중심임을 알 수 있다.

민속에서 청결을 요하는 장소인 장독대에서 목욕재계한 몸가짐으로 올리는 깨끗한 물 정화수도 청정도량 지계 수행자가 매일 불전에 올리는 청정수와 유사한 헌물로서 지극정성의 제물임을 알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볏섬, 뒤주 등에 올리는 ‘섬밥’을 송석하가 ‘정반(淨飯)’이라 부언한 것도 신성한 제물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이야기의 보고인 ‘영동 할만네’는 앞으로도 시대상을 반영하는 이야기를 꾸준히 만들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기후학적 현상(푄현상)이 해마다 되풀이될 것이기 때문이다. 음력 2월 달에 부는 봄바람은 변덕이 참 심하다. 옛 어른들은 이를 할머니의 마음에 비유했다. 고부갈등, 노파심 등의 표현은 문학적으로 변덕스러운 할머니의 마음을 상징한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딸과 나들이하고, 비가 와서 궂은 날은 며느리를 데리고 나들이한다는 영등 할만네의 이야기만큼 ‘갑질 할머니’의 심보를 적절하게 표현한 스토리텔링이 또 어디에 있을까. 영등 할만네에 대한 이끌림은 바람이라는 ‘스토리(story)’가 딸과 며느리의 ‘텔링(telling, 말하기)’의 모양새로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2월에 부는 한시적 계절풍일지라도 의미를 담아 그 시의에 걸맞은 문화를 곧잘 일구어 왔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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